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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화계사의 역사 화계사(華溪寺) 고려 광종 때 탄문이 현재의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을 창건하였다. 이후 조선 중종 통치기 1522년에 신월선사가 고려 때부터 있던 암자를 옮겨 건립하였고 화계사로 개명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덕흥대원군(광해군의 할아버지) 가문의 도움으로 중수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흥선군이 재야에 있을 때 화계사에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백과사전] 낙산사의 역사 낙산사(洛山寺) 한국의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백과사전] 호국사의 역사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임진왜란 때 전몰한 장수들을 배향한 창열사가 바로 정문에서 왼쪽 편에 붙어 있고, 오른 편으로는 서장대가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사천왕상과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정면으로는 대웅전이 있다. 항상 독경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백과사전] 현등사의 역사 현등사(懸燈寺) 현등사는 법흥왕이 527년 불교를 공인하고 13년 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교를 전하기 위해 온 승려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해 지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졌지만, 898년에 도선국사가 고쳐 지었다. 도선국사는 동쪽의 기가 약하다고 생각해 이를 메꾸기 위해 현등사를 이용했다. 이후 1210년에 지눌이 다시 고쳐 지었는데, 밤중에 산속에서 빛이 나 가보니 버려진 절터에서 등이 빛나고 있어서 현등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1411년에 함허대사가 다시 고쳐 지었다. 1811년에 취윤과 원빈이 다시 고쳐 지었지만, 1823년에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백과사전] 향림사의 역사 향림사(香林寺)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국사가 세웠고 조선 현종 10년(16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승려이자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때 이수광이 편찬한 『승평지』에 따르면 이 부근의 지형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그 기운이 너무 강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향림사를 지었다고 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향림사(香林寺)라는 이름에 맞추기라도 하듯 절 주변에는 ..
[백과사전] 표충사의 역사 표충사(表忠寺)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竹林寺)이다.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5년(1839)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
[백과사전] 칠장사의 역사 칠장사(七長寺) 칠장사는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서 크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지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
[백과사전] 청암사의 역사 청암사(靑巖寺)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었다. 1897년에 폐사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11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이 복구했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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