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236)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과사전]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생애 역사적 배경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티라우라코트)을 중심으로 샤캬 공화국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캬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라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탄생 싯다르타의 탄생을 표현한 부조. 슈도다나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왕비가 6개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구리성)로 향했는데, 음력 .. [백과사전] 석가모니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샤캬무니)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샤캬무니)는 불교의 교조이며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 10가지 존칭과 본명인 싯다르타 가우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가우타마 붓다(영어: 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샤캬족의 국가인 샤캬 공화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 [백과사전] 흥천사의 역사 흥천사(興天寺) 흥천사는 조선 태조 6년(1397년) 창건되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현비 강씨가 동왕 5년(1396년) 가을 8월 무술에 사망하자 태조는 왕후 강씨의 능침을 수도 한양도성 안의 경복궁 서쪽 황화방(皇華坊)에 조성하고 강씨의 명복을 기원할 원찰로써 흥천사 건립을 발원하였다. 양촌 권근이 왕명을 받들고 지은 《정릉원당조계종본사흥천사조성기》에 따르면 공사는 1년이 조금 안 되어 마무리되었고, 불전과 승방, 대문, 행랑, 부엌, 욕실 등 모두 170칸, 하사된 전지는 1천 결이나 되었다고 한다. 태조 7년(1398년)에는 흥천사 북쪽에 3층 사리전을 창건하도록 하였다(사리전은 정종 1년(1399년)에 낙성됨). 태조는 흥천사의 공역에 거동해 인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흥천사가 완공되지 않았.. [백과사전] 흥왕사의 역사 흥왕사(興王寺) 고려 문종 10년(1056년)에 짓기 시작, 12년 만에 낙성된 대사찰이다.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가 있었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을 간행했다.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서 승려가 된 징엄(澄嚴)이었다.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에 이 절에서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자 공민왕은 잠시 복주(福州) 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환도하여 잠시 흥왕사에 행궁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용(金鏞)이 역심을 품고 무리들과 함께 이 절에 침범하여 시위를 죽이고 왕까지 시해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다급히 태후 밀실로 피신하였고, 노국.. [백과사전] 흥륜사의 역사 흥륜사(興輪寺)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 [백과사전] 흥국사의 역사 흥국사(興國寺) 흥국사(興國寺)는 여수시 영취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찰로 1195년(고려 명종 25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호국 불교의 성지인 이곳은 임진왜란시 승병 훈련소로도 유명하였다. 이 절은 호국정신이 창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이 정신이 크게 부가된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시에 의승군의 본거지가 되어 400여 명이 활약한 때이다. 절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부조전, 응진전 등 14채의 절집과 괘불, 보물 제578호인 대웅전 후불 탱화, 그리고 보물 제563호인 홍교가 있다.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고 전한다. [백과사전] 황룡상의 역사 황룡사(皇龍寺)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 [백과사전] 화엄사의 역사 화엄사(華嚴寺)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에 연기가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법사가 증축하였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 7층탑 · 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봉성지》(鳳城志)에 따르면, 문무왕 때 의상국사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였다.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이 다시 증축했다. 고려시대에도 중수가 잇따랐다. 943년(고려 태조 26년)에 도선의 유지에 따라 오백선찰을 먼저 건립하고 뒤에 삼천팔백사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면서 기존 사찰 중 화엄사가 제일 먼저 중수되었다. 이후에는 광종대, 문종대, 인종대, 충숙왕대에 걸쳐 총 네 차례에 걸친 .. 이전 1 ··· 94 95 96 97 98 99 100 ··· 15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