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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주요 인물/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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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갸초(티베트어: བསྟན་འཛིན་རྒྱ་མཚོ་, 1935년 7월 6일~ )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제14대 달라이 라마이다. 현 달라이 라마인 텐진갸초는 티베트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겨지며 티베트인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 왕국의 아무르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에 전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받아 1939년에 새로운 달라이 라마로 옹립되었다. 즉위식은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1940년 2월 22일에 거행되었으며, 성인의 자격을 인정받은 1950년 11월 17일에 15세의 나이로 달라이 라마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물려받았다. 달라이 라마와 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겔룩파는 티베..
[백과사전] 제13대 달라이 라마 제13대 달라이 라마 툽땐갸초(티베트어: ཐུབ་བསྟན་རྒྱ་མཚོ་, 1876년 5월 5일 ~ 1933년 12월 17일)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제13대 달라이 라마이다. 정식 법명은 아왕로쌍툽땐직쩨촉레남게이다. 라싸 동남쪽 닥뽀(達布) 지방 한 농가에서 태어났고, 1878년 6월 13일 포탈라궁 사자좌에 앉았다. 당시 티베트는 청나라, 영국, 러시아의 대립 가운데 휘말렸다. 핀란드 대통령인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몽골을 여행하는 도중 달라이 라마를 만났는데, 이때 달라이 라마는 영국에 대해 회의적이나 러시아와의 관계 수립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4년에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라싸에 주둔시켰고, 라싸 조약에 조인하지만 청나라가 티베트의 주권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달라..
[백과사전] 제12대 달라이 라마 제12대 달라이 라마 친레갸초(티베트어: འཕྲིན་ལས་རྒྱ་མཚོ, 1857년 ~ 1875년)는 제12대 달라이 라마이다. 그의 짧은 치세 동안, 티베트 외부 세계는 격랑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동안 티베트를 보호해왔던 청나라의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지며 티베트에 대한 대영제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이미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인도와 더불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티베트의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1858년에 제11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임을 인정받았고, 1860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티베트의 우호국이었던 시킴과 부탄 지역의 군대와 영국의 군대가 충돌하자, 티베트 정부는 이에 항의하며 티베트로 향하는 모든 유럽 여행자들의 출입을 막았다. 게다가 이 전쟁은 영국이 티베트를 ..
[백과사전] 제11대 달라이 라마 제11대 달라이 라마 케줍갸초(티베트어: མཁས་གྲུབ་རྒྱ་མཚོ་, 1838년 ~ 1856년)는 제11대 달라이 라마이다. 케줍갸초는 제7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났던 마을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0년에 제10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고, 7대 판첸 라마가 그에게 예비 탁발식을 해주었으며 그에게 '케줍갸초'라는 이름을 주었다. 1842년에 포탈라궁의 황금 옥좌에 앉아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7년 후 탁발을 하고 완전한 승려로 출가하게 되었다. 그는 1842년 5월에 왕좌에 앉아 섭정으로부터 권력 승계과정을 밟고 있었으나, 승계과정이 다 끝나기 전에 급사하여, 권력기반이 제대로 굳혀지기도 전에 사망한 세 번째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아래의 문장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문장..
[백과사전] 제10대 달라이 라마 제10대 달라이 라마 취침갸초(티베트어: ཚུལ་ཁྲིམ་རྒྱ་མཚོ་, 1816년 ~ 1837년)는 제10대 달라이 라마이다. 티베트 동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820년에 제9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았고, 1822년 포탈라 궁에서 10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하였다. 취침갸초는 전대 달라이 라마가 서거하고 8년이나 지난 후에 새로운 달라이 라마로 즉위하였는데, 이는 당시 티베트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1822년, 그는 포탈라 궁에 있는 황금 옥좌에 올랐고, 판첸 라마에게 '취침갸초'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받았다. 후에 판첸 라마는 취침갸초에게 겔룩파의 맹세를 시키기도 하였다. 1826년에 그는 드레풍 사원에 들어갔고, 티베트의 학문에 통달하였다. 그는 그의 일생동안 티베..
[백과사전] 제9대 달라이 라마 제9대 달라이 라마 룽독갸초(티베트어: ལུང་རྟོགས་རྒྱ་མཚོ་, 1805년 ~ 1815년)는 제9대 달라이 라마이다. 14명에 이르는 달라이 라마들 중 유일하게 유아기 시절에 사망한 달라이 라마이며, 22살이 되기 전에 죽은 첫 달라이 라마이다. 8대 달라이 라마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룽독갸초는 라싸 근처의 사원으로 불려가 다른 후보자들과 함께 승려들에 의해 환생자 여부 심사를 받게 된다. 그는 8대 달라이 라마를 옆에서 보좌했던 승려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으며, 당시 7대 판첸라마에게도 적합 판정을 받았다. 1808년, 그는 머리를 깎고 정식으로 '룽독갸초'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1810년에, 그가 포탈라 궁에 있는 황금 옥좌에 앉음으로써 그의 치세가 시작되게 된다. 당시 유럽의 ..
[백과사전] 제8대 달라이 라마 제8대 달라이 라마 참빼갸초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였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서는 유례없는 대풍년이 들어 보리를 무려 3 ~ 4번이나 수확하였으며, 그녀가 집 밖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을 때 거대한 무지개가 내려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고 한다. 이는 티베트 전통에서 성스러운 존재의 출현을 의미한다. 1758년에 태어나, 아기는 종종 명상 자세를 취하거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6대 판첸 라마가 이 아이에 대한 소문을 듣자, 그는 아이를 직접 확인하고 제7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임을 공포했다. 2살 반의 나이에, 참빼갸초는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에 들어가 라마들과 승려들에 둘러싸여 자라게 되었고, 달라이 라마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라싸로 옮겨졌고, 포탈라궁에서 정식 대관식을 치르..
[백과사전] 제7대 달라이 라마 제7대 달라이 라마 게샹갸초는 티베트 동부의 리장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포탈라궁의 왕좌는 예셰갸초가 창양갸초를 쫓아내고 차지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예셰갸초를 정식 달라이 라마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언자들은 게샹갸초가 태어나자 그를 창양갸초의 환생자로 인정했다. 그가 창양갸초의 환생자로 공인받자, 게샹갸초는 살해의 위협을 피해 사원으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제왕교육과 승려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1715년, 중국의 강희제는 게샹갸초를 정식으로 인정했고, 이로 인해 예셰갸초와 본격적인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는 12살이 되던 해인 1720년에 정식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고, 이때부터 그의 치세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오이라트인들이 1717년에 티베트로 쳐들어왔고, 예..
[백과사전] 제6대 달라이 라마 제6대 달라이 라마 창앙갸초(티베트어: ཚངས་དབྱངས་རྒྱ་མཚོ, 1683년 3월 1일 ~ 1706년 11월 15일)는 제6대 달라이 라마이다. 인도 동북부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제4대 달라이 라마와 함께 현재까지 몇 안되는 티베트인이 아닌 달라이 라마 중 한 사람이다. 상당히 영민했다고 전해지며, 쾌락, 술, 여자를 좋아하였으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중국 칭하이성 근처에서 행방이 불명되었으며, 학자들은 이를 암살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시와 노래 짓기를 좋아하였으며, 그가 지은 노래들은 티베트 전역에서 불렸다. 역사 1682년에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위 승려들은 그의 선종을 숨겼다. 이와 같은 행동은 티베트 내의 소요를 가라앉히고 포탈라궁의 완공을 최대한 순조롭..
[백과사전] 제5대 달라이 라마 제5대 달라이 라마 아왕로쌍갸초(티베트어: ངག་དབང་བློ་བཟང་རྒྱ་མཚོ་, 1617년 ~ 1682년)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제5대 달라이 라마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가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면, 아왕로쌍갸초는 티베트 전역에 막강한 영적,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첫 달라이 라마이다. 그는 보통 '위대한 5대'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적 식견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티베트의 내분을 종식시켰다.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아와 중국과 그 외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유럽의 여행자들을 알현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아왕로쌍갸초는 또한 청나라의 순치제하고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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