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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 사찰 정보/황룡사

[백과사전] 황룡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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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皇龍寺)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는 황룡사에서 고승을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였고 왕이 친행예불한 장소로는 황룡사 이외의 곳에서 예불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왕조가 바뀌어 고려조에 이르러서도 광종 5년(954)때에 벼락으로 목탑이 소멸하자 60여년이 지난 1012년 다시 재건을 시작하여 9년만에 완공했고 정종 2년(1035), 현종 1년(1095)에 보수공사 3년(1012)에 조유궁(朝遊宮)을 헐어서 9층탑을 수리하는 등 보호에 힘썼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의 난으로 말미암아 회진되고 말았다.

남겨진 절터에 의하여 황룡사의 규모를 추정할 때, 경내는 약 2만평으로 추정되며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남북선상에 서고, 구당과 중문을 연결하여 동서로 회랑을 돌려 내정에 금당과 구당을 두는 일탑식(一塔式) 가람제도(伽藍制度)로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그 절터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

회랑으로 형성되는 내정(內庭)에는 금당 좌우와 중문 좌우에 각각 건물자리가 있고 탑의 기단 4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의 결과 전면 10간, 측면 4간의 큰 강당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

주위에는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발굴에 따라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 국가적 대찰에 부끄럽지 않는 대황룡사의 모습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

"철반이상(鐵盤已上)"이라는 표현을 보면 상륜(相輪)은 금속제이었을 것이다. 탑지 북쪽에는 금당지가 있어 정면 9간, 측면 4간의 대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불대좌(佛臺座) 3기가 있어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안치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 솔거(率居)의 노송도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북방에는 정면 10간, 측면 4간의 대구당이 있었으니 지금도 2 · 3개를 제외하고는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부전(敷塼)이 중앙에서 동으로 치우쳐서 석조가 남아 있다. 또한 동서 양측에는 회랑지(廻廊址)가 있어 고신라기의 대찰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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