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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천장사의 역사 천장사(天藏寺) 천장사는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나 담화선사는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며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나 유적도 현존하지 않는다. 천장사 칠층석탑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대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부에 관음사의 후불탱화로 1788년(정조 12) 제작된 불화가 있는데 관음사가 어느 절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1896년(고종 33) 제작된 신중탱화도 있다. 근현대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렀고 만공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한다. 한편 최인호(崔仁浩)의 소설 『길없는 길』로 널리 알려졌다. 법당 앞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 지정된 천장사 칠층석탑이 있..
[백과사전] 천곡사의 역사 천곡사(泉谷寺) 천곡사는 신라 시대에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피부병을 앓던 선덕여왕이 천곡사가 있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의 약수에 목욕하고 완쾌한 뒤,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해 하면서 자장에게 명하여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도 천곡령에서 따왔고, 절 안에는 선덕여왕이 목욕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 석정(石井)이 남아 있다. 가뭄이 심할 때도 석정에서는 맑고 영험한 물이 샘솟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오랫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전쟁 피해를 자주 겪어 여러 차례 폐사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13동의 건물을 보유한 대형 사찰이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친 뒤 부도탑과 석주, 건물 몇 채만 남은 작은 ..
[백과사전] 직지사의 역사 직지사(直指寺) 신라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해서 ‘직지’라는 사명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하였다.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黃岳山)은 청, 황, 적, 백, 흑의 5색 중에서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우리나라를 놓고 볼 때 직지사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황악산이라 부르고 그 안에 터를 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동국제일가람으로 불려 왔다. 황악산..
[백과사전] 증심사의 역사 증심사(證心寺) 신라 헌안왕 4년(860년)에 철감선사 도윤이 처음 세운 절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선종 11년(1094년)에 혜조국사가 중수했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 김오(金傲)가 자신의 녹봉으로 낡은 건물을 다시 고쳐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다시 지었고, 그 뒤에도 개·보수를 거듭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전화로 불에 타 없어졌다. 금동석가여래입상(당시 국보 제211호)과 금동보살입상(당시 국보 제212호)은 광주경찰서 금고로 옮겨 보관되고 있었으나 전쟁 중에 유실되어, 국보 지정도 해제됐다. 오늘날의 건물은 1970년에 크게 증축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백과사전] 전등사의 역사 전등사(傳燈寺)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한국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길다.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명명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신부주(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고려 왕실은 전등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계속해서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조선 광해군 대에 이르러 화재로 ..
[백과사전] 자재암의 역사 자재암(自在庵)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증건했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
[백과사전] 임휴사의 역사 임휴사(臨休寺) 신라 경명왕 5년(921년)에 영조(靈照)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휴사는 팔공산 일대에 산재한 고려 태조 왕건의 설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 전투에서 패해 도망친 뒤 이 곳에 와서 군사를 추스려 쉬어갔다는 전설이다. 왕건이 잠시 쉬어간 절이라 하여 임휴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조선 후기인 1811년에 중창했다. 현대에 와서 2004년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여 주건물인 대웅전과 산실각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불상과 탱화도 꺼내오지 못한 큰 사고였다. 문화재로는 요사 아래쪽 목재 계단 밑에 조선 시대의 부도 1기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임휴사는 관세음보살에게 올리는 기도가 효험이 있다 하여 관음기도처로 유명하다. 왕건의 전설에도 팔공산에서 ..
[백과사전] 일락사의 역사 일락사(日樂寺) 일락사는 663년(문무왕 3) 의현선사가 세웠다고 하지만 의현선사란 인물을 확인하기 어렵다. 1918년 제작된 「일락사 대웅전 중창기」에 의하면 1487년(성종 18), 1530년(중종 25), 1649년(인조 27)에 걸쳐 여러 차례 중창하였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957년 토지대장에는 일악사(日嶽寺)로 되어 있어 최근에 일락사로 절 이름이 바뀐 듯하다. 현재 대웅전은 1993년에 건물을 해체하여 원래 자리 오른쪽에 세웠는데 이때 ‘명부전’이란 현판을 달았으며, 이전 자리에는 대적광전을 새로 지었다. 1984년 5월 17일 일락사 대웅전, 일락사 삼층석탑, 일락사 철불이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일락사는 1988년 6월 18일 전통 사찰 45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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