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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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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낙산사의 역사 낙산사(洛山寺) 한국의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 옆쪽에 있는 이 불전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이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문을 옆면에 달아 앞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조그만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고 ‘보타굴’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백과사전] 호국사의 역사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임진왜란 때 전몰한 장수들을 배향한 창열사가 바로 정문에서 왼쪽 편에 붙어 있고, 오른 편으로는 서장대가 위치해 있다. 입구에는 사천왕상과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정면으로는 대웅전이 있다. 항상 독경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백과사전] 현등사의 역사 현등사(懸燈寺) 현등사는 법흥왕이 527년 불교를 공인하고 13년 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교를 전하기 위해 온 승려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해 지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졌지만, 898년에 도선국사가 고쳐 지었다. 도선국사는 동쪽의 기가 약하다고 생각해 이를 메꾸기 위해 현등사를 이용했다. 이후 1210년에 지눌이 다시 고쳐 지었는데, 밤중에 산속에서 빛이 나 가보니 버려진 절터에서 등이 빛나고 있어서 현등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1411년에 함허대사가 다시 고쳐 지었다. 1811년에 취윤과 원빈이 다시 고쳐 지었지만, 1823년에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다.
[백과사전] 향림사의 역사 향림사(香林寺)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국사가 세웠고 조선 현종 10년(16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승려이자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때 이수광이 편찬한 『승평지』에 따르면 이 부근의 지형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그 기운이 너무 강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향림사를 지었다고 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향림사(香林寺)라는 이름에 맞추기라도 하듯 절 주변에는 ..
[백과사전] 표충사의 역사 표충사(表忠寺)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竹林寺)이다.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5년(1839)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
[백과사전] 칠장사의 역사 칠장사(七長寺) 칠장사는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서 크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지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
[백과사전] 청암사의 역사 청암사(靑巖寺)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었다. 1897년에 폐사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11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이 복구했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도..
[백과사전] 천장사의 역사 천장사(天藏寺) 천장사는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나 담화선사는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며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나 유적도 현존하지 않는다. 천장사 칠층석탑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대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부에 관음사의 후불탱화로 1788년(정조 12) 제작된 불화가 있는데 관음사가 어느 절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1896년(고종 33) 제작된 신중탱화도 있다. 근현대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렀고 만공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한다. 한편 최인호(崔仁浩)의 소설 『길없는 길』로 널리 알려졌다. 법당 앞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 지정된 천장사 칠층석탑이 있..
[백과사전] 천곡사의 역사 천곡사(泉谷寺) 천곡사는 신라 시대에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피부병을 앓던 선덕여왕이 천곡사가 있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의 약수에 목욕하고 완쾌한 뒤,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해 하면서 자장에게 명하여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도 천곡령에서 따왔고, 절 안에는 선덕여왕이 목욕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 석정(石井)이 남아 있다. 가뭄이 심할 때도 석정에서는 맑고 영험한 물이 샘솟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오랫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전쟁 피해를 자주 겪어 여러 차례 폐사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13동의 건물을 보유한 대형 사찰이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친 뒤 부도탑과 석주, 건물 몇 채만 남은 작은 ..
[백과사전] 직지사의 역사 직지사(直指寺) 신라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해서 ‘직지’라는 사명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하였다.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黃岳山)은 청, 황, 적, 백, 흑의 5색 중에서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우리나라를 놓고 볼 때 직지사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황악산이라 부르고 그 안에 터를 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동국제일가람으로 불려 왔다. 황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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