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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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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마하가섭 마하가섭(摩訶迦葉) 마하카샤파(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 또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은 고타마 붓다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 가섭 또는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 또는 대구씨(大龜氏)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고타마 붓다의 신임을 받아 제자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비탄에 빠지거나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으며, 제1회 불전 결집을 지휘하였다. 영취산(靈鷲山)에서 고타마 붓다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
[백과사전] 라훌라 라훌라 라훌라는 석가모니의 친자식이며, 또 그 제자의 1명. 석가모니의 아내인 야쇼다라 왕비가 석가모니의 출가전에 임신한 아이로, 석가모니가 출가 이전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십대제자의 한 명으로 꼽혀 밀행 제일이라고 칭해진다. 또 아라한의 한 명이기도 하다. 출생 그의 어머니나 신변에 대해서는 제설이 있다. 「12유경」에는, 석가가 실다태자의 무렵, 제1비 구이(고피, 혹은 고파), 제2비 야소다라, 제3비 카노가 있으나 「슈다쓰나경」, 「즈이오경」에서는 구이의 아이로 한다. 「전대미문 인연경」·「열반경」·「법화경」에서는 야소다라 왕비의 아이로 한다. 통상의 상당수는 이 설을 채용하고 있다. 덧붙여 석가의 출가전에는, 그 이외에도 제1비 구이와의 사이의 아이로 우파마나, 제3비 카노와의 사이에 선성이라는..
[백과사전] 가전연 가전연(迦旃延) 가전연(迦旃延)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십대제자의 한 명이다. 논의제일로 칭해진다. 마하(Maha=위대한이라는 뜻)를 붙여 마하가전연, 혹은 대가전연 등이라고도 불린다. 석가의 십대제자의 한 명. 논의제일로 칭해진다. 마하(Maha=위대한이라는 뜻)를 붙여 마하가전연, 혹은 대가전연 등이라고도 불린다. 경력 그가 언제 불교 교단에 들어갔는가는 모르지만, 초기의 불교 전도에 중요한 기능을 했다. 덧붙여 그의 출신설 1에서는, 그 지역은 아직도 포교 권외였으므로, 불이나 사리불, 모쿠렌의 입멸후, 교단의 중심이 되어 자주 활약했다고 한다. 어릴 적보다 총명하고, 한 번 들은 내용은 잊지 않고 잘 이해했다고 말해진다. 그런데도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석가에 가르침을 청하게 되어, 이..
[백과사전] 흥천사의 역사 흥천사(興天寺) 흥천사는 조선 태조 6년(1397년) 창건되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현비 강씨가 동왕 5년(1396년) 가을 8월 무술에 사망하자 태조는 왕후 강씨의 능침을 수도 한양도성 안의 경복궁 서쪽 황화방(皇華坊)에 조성하고 강씨의 명복을 기원할 원찰로써 흥천사 건립을 발원하였다. 양촌 권근이 왕명을 받들고 지은 《정릉원당조계종본사흥천사조성기》에 따르면 공사는 1년이 조금 안 되어 마무리되었고, 불전과 승방, 대문, 행랑, 부엌, 욕실 등 모두 170칸, 하사된 전지는 1천 결이나 되었다고 한다. 태조 7년(1398년)에는 흥천사 북쪽에 3층 사리전을 창건하도록 하였다(사리전은 정종 1년(1399년)에 낙성됨). 태조는 흥천사의 공역에 거동해 인부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흥천사가 완공되지 않았..
[백과사전] 흥왕사의 역사 흥왕사(興王寺) 고려 문종 10년(1056년)에 짓기 시작, 12년 만에 낙성된 대사찰이다.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가 있었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을 간행했다.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서 승려가 된 징엄(澄嚴)이었다.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에 이 절에서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자 공민왕은 잠시 복주(福州) 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환도하여 잠시 흥왕사에 행궁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용(金鏞)이 역심을 품고 무리들과 함께 이 절에 침범하여 시위를 죽이고 왕까지 시해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다급히 태후 밀실로 피신하였고, 노국..
[백과사전] 흥륜사의 역사 흥륜사(興輪寺)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
[백과사전] 흥국사의 역사 흥국사(興國寺) 흥국사(興國寺)는 여수시 영취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찰로 1195년(고려 명종 25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호국 불교의 성지인 이곳은 임진왜란시 승병 훈련소로도 유명하였다. 이 절은 호국정신이 창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고, 이 정신이 크게 부가된 것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시에 의승군의 본거지가 되어 400여 명이 활약한 때이다. 절안에는 보물 제396호인 대웅전, 원통전, 팔상전, 부조전, 응진전 등 14채의 절집과 괘불, 보물 제578호인 대웅전 후불 탱화, 그리고 보물 제563호인 홍교가 있다.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고 전한다.
[백과사전] 황룡상의 역사 황룡사(皇龍寺) 황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어느 사찰보다도 월등히 많이 볼 수 있다. 우선 기록에 나타난바 각종 건축의 연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 창건 이래 선덕여왕대의 9층탑의 완성까지는 90년의 장시일이 경과되고 있다. 진흥왕 14년(553) 창건 진흥왕 27년(566) 일차 공사완성 진흥왕 30년(569) 주위장우(周圍墻宇) 완성 진흥왕 35년(574)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높이가 일장 육척이 되는 삼존불상) 조성 진평왕 6년(584) 금당 조성 선덕여왕 14년(645) 9층탑 조성 경덕왕 13년(754) 종 조성(造成) 황룡사는 국가적 대찰로서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황룡사의 9층 목탑과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은 신라의 3보로 숭앙을 받아왔다...
[백과사전] 화엄사의 역사 화엄사(華嚴寺)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에 연기가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화엄경》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법사가 증축하였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 7층탑 · 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봉성지》(鳳城志)에 따르면, 문무왕 때 의상국사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였다.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이 다시 증축했다. 고려시대에도 중수가 잇따랐다. 943년(고려 태조 26년)에 도선의 유지에 따라 오백선찰을 먼저 건립하고 뒤에 삼천팔백사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면서 기존 사찰 중 화엄사가 제일 먼저 중수되었다. 이후에는 광종대, 문종대, 인종대, 충숙왕대에 걸쳐 총 네 차례에 걸친 ..
[백과사전] 화계사의 역사 화계사(華溪寺) 고려 광종 때 탄문이 현재의 화계사 인근에 보덕암을 창건하였다. 이후 조선 중종 통치기 1522년에 신월선사가 고려 때부터 있던 암자를 옮겨 건립하였고 화계사로 개명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덕흥대원군(광해군의 할아버지) 가문의 도움으로 중수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흥선군이 재야에 있을 때 화계사에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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