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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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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통도사의 역사 통도사(通度寺) 신라 선덕여왕 재위 중인 646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고, 금강계단에 진짜 부처인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대웅전에는 부처의 모형인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선조 36년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 인조 19년 우운(友雲)이 중건하였다.
[백과사전] 송광사의 역사 송광사(松廣寺) 신라 말 혜린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로 작은 규모의 절이었다. 이후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절을 확장하려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 이때 고려 희종이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그 동안 정유재란, 한국 전쟁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백과사전] 해인사의 역사 해인사(海印寺)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35년 11월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이곳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라는 당시 주지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여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해인..
[백과사전] 삼계교 삼계교 三階敎 수(隋)나라의 신행(信行, 540∼594)이 당시 활발했던 말법사상(末法思想)에 입각하여 말법상응(末法相應)의 가르침으로서 설법한 것이며 보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한다. 신행은 불교를 3단계로 나누었으며 신행 당시는 이미 제3계의 말법에 들어가 어리석고 악한 범부(凡夫)는 제1계의 1승(一乘), 제2계의 3승 등의 별법(別法)에 의탁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부처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법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며 승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불(一切佛)·일체법(一切法)·일체승(一切僧)에 귀의, 일체악(一切惡)을 끊고 일체선(一切善)을 닦아야 할 제3계의 보법(普法)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구원되지 않는다 하여 제3계의 불교, 즉 삼계교(三階敎)를 창도했다. 그는 구족계(具足戒)의 준수를 폐..
[백과사전] 밀교 밀교 密敎 수당시대(隋唐時代)의 종파 불교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밀교(密敎)의 전래이다. 다라니(陀羅尼)는 예로부터 조금씩 중국으로 전해졌으나 나란다사(寺)의 학승(學僧)이었던 선무외(善無畏)가 716년(玄宗의 開元4)에 입조(入朝)하여 밀교를 전하면서 과 그 밖의 것을 번역했다. 제자인 일행(一行, 683∼727)은 삼론(三論)과 천태(天台)를 배워 이 입장에서 을 주석하여 를 저술했다. 또한 720년(開元8)에는 역시 나란다사(寺)의 학승인 금강지(金剛智)가 와서 을 번역했으며 또한 그의 제자 불공(不空)은 스승의 사망 후 인도에 돌아가 밀교 경전(密敎經典)>을 비롯한 80부의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만다라(曼茶羅)의 염송(念誦), 다라니의 독송(讀誦),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인 수법(修..
[백과사전] 법상종 법상종 法相宗 법상종이란 제법(諸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종(宗)이란 뜻으로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세워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미륵(彌勒)·무착(無着)·세친의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에 기원하며 당나라 태종 시대에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간 현장(玄裝, 600∼664)이 호법(護法)의 제자 계현(戒贅)으로부터 호법 계통의 유식설을 전해받고 많은 경론(經論)을 전역(傳譯)함과 동시에 유식의 교리를 선양했다. 진체삼장(眞諦三藏)에 의해서 전해진 유식설을 '구역(舊譯)'이라고 함에 대해 이 현장이 전한 것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현장은 호법의 설을 중시하여 을 번역, 그의 제자 자은대사 규기(慈恩大師 窺基, 632∼682)가 · 등을 저술하여..
[백과사전] 율종 율종 律宗 율종은 계율을 종(宗)으로 하는 종파이며 북제(北齊)의 혜광(慧光)이 시작한 연구 학파가 발전하여 한 종이 된 것이다. 그후 율장 안에 분파가 생겨 법려(法礪, 569∼635)의 상부종(相部宗),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종(南山宗), 회소(懷素,625∼698)의 동탑종(東塔宗) 등 셋으로 나뉘었으나 그 가운데에서 도선의 남산율종이 다른 두 파를 압도, 번영을 누렸다. 도선은 단지 율종의 조직자일 뿐만 아니라 경록(經錄)으로서는 , 사서(史書)로는 , 도교(道敎)에 대해서는 · 등을 저술하여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율(律)에 관해서는 이 소승률이며 대승불교도가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뜻을 두고, 유식의 교리를 원용(援用),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기본으로 하여 소승계를 중시하면서 ..
[백과사전] 선종 선종 禪宗 옛날 후한시대에 인도의 좌선(坐禪) 방법 등을 설법한 선경(禪經)이 전역(傳譯)되었으나 선종으로서 발전하는 선을 전한 것은 470년경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이며, 그후 북주파불(北周破佛)을 만난 혜가(慧可)·승찬(僧璨)을 거쳐 기주 황매(黃梅)에서 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선법을 설법한 도신(道信)·홍인(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에서 탁월한 많은 선자(禪者)가 배출되었으며, 이리하여 선종으로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 대표가 6조(六祖)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북지(北地) 양경(兩京)을 중심으로 북종선(北宗禪)을 보급, 혜능은 강남(江南)에 남종선(南宗禪)을 선양했는데 북종선이 빨리 쇠퇴했음에 비해 남종선은 신회(神會)·회양(懷讓)·행사(行思)를 비롯한 수..
[백과사전] 정토교 정토교 淨土敎 ··의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에 바탕을 두고 인도의 용수(龍樹)·세친(世親)에 사상적 기반을 갖는 정토교는 옛날 진나라 시대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에 의한 백련사(白蓮社)에 교단적 조직을 갖고 다수의 신봉자를 획득했으나 구칭염불에 의한 극락왕생을 설법하는 참된 중국 정토교로서의 조직화는 담란(曇鸞, 476∼542)에 의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는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을 주석하여 를 저술, 정토교 교리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 을 쓴 도작(道綽, 562∼645)으로서 불교를 성도(聖道)·정토의 둘로 나누어 말법5탁(末法五濁)의 세상에는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정토교가 유일한 길이라 했으며 또한 선도(善導, 613∼681?)에 이르러 정..
[백과사전] 화엄종 화엄종 華嚴宗 을 소의(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당대(唐代)의 화엄종 제3대 조사인 현수대사(贅首大師) 법장(法藏, 643∼712)[1]에 의해 번창된 종파이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불교 교리발전의 2대쌍벽(二大雙璧)으로 알려져 있다. 은 이미 인도에서 세친(世親)이 중 을 주석하여 을 지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중국 북위(北魏)에 지론종(地論宗)이 일어난 것처럼 연구가 왕성했다. 중국에 있어서도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駝跋陀羅)에 의해 이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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