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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海印寺)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35년 11월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이곳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라는 당시 주지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여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해인사의 모습
이후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고려 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기도 하며,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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