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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감산덕청 감산덕청 (1546∼1622) 금릉의 전초(全椒:安徽省)에서 태어났다. 감산은 호로서 감산대사라고 존칭된다. 11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불교의 경론과 유교의 전적을 가까이 하였다. 19세때 출가하여 변융(辯融)·소암(笑嚴)·운곡(雲谷) 기타 많은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선풍(禪風)을 진흥함은 물론 여산에 초암(草庵)을 짓고 염불을 닦았다. 그의 사상은 선과 화엄과의 융합에 핵심을 두고 있으며 이로써 제종조화를 꾀하려 하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 등 특정한 종파에 구애받지 않는 폭넓은 점이 있다. 또한 ·· 등을 저술했는데 이들은 모두 불교사상으로서 유교와 노장사상의 전적(典籍)을 해석한 것으로 3교조화사상이 나타나 있다. (이라고도 한다)은 3교를 논한 것으로서 유명하며 3교 이동(異同)의 비교..
[백과사전] 3교일치 3교일치 三敎一致 유교·불교·도교의 3교는 각기 성립 경위와 사상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3교를 조화시켜 절충융합하려는 움직임이 삼국시대 이후 끊임없이 나타났다. 손작(孫綽)의 , 주옹의 , 고환(顧歡)의 등이 3교조화의 입장에 있으며 맹경익(孟景翼)의 과 안지추(顔之推)의 은 2교일치(二敎一致)를 주장하고 있다. 수대(隋代)의 이사겸(李士謙)이나 왕통(王通), 당대(唐代)의 양숙(梁肅)·이고·징관(澄觀)·종밀(宗密)·여동빈(呂洞賓) 등은 입장이나 뉘앙스에 차이는 있으나 모두 3교합일론을 펴고 있다. 송대(宋代)에서는 계숭(契崇)·장상영(張商英)·효종황제(孝宗皇帝)·이순보(李純甫) 등이 있으며 원대(元代)에는 유밀(劉謐)이 있다. 명대(明代)의 대표적인 불교인으로서는 운서주..
[백과사전] 운서주굉 운서주굉 (1535∼1615) 인화(仁和:浙江省)에서 출생하였으며 연지대사(蓮池大師)라고 존칭된다. 화엄종의 학승(學僧) 변융(辯融)과 선승 소암(笑巖)에게서 불학(佛學)을 배웠으나 후에 여러 곳을 편력한 후 마침내 항저우(杭州:浙江省)의 운서(雲棲)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 운서사(雲棲寺)를 다시 일으키고 문하의 제자 교육, 신도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 밑에 1000여인(人)의 승속(僧俗)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광인(廣印)·원현(元贅) 등이 유명하다. 그의 사상적인 특색은 여러 종파를 융합하여 통일적인 불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점에 있다. 그는 계율(戒律)의 부흥에 노력하고 계율을 기초로 하여 이에 선(禪)과 염불을 융합시켰다. 일체의 행위를 선악2문(善惡二門)으로 나누고, 선..
[백과사전] 삼종일원 삼종일원 三宗一源 명(明)의 태조(1368∼1398)가 선승(禪僧) 출신이라고도 하며, 재상이었던 송염(宋濂)도 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두 사람은 다 같이 불교와 불교도를 보호하고 대장경의 간행을 행하였다. 종세(宗勢)로서는 선종이 우뚝하여 다른 종파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천태·화엄·정토의 제종파는 교종합동(敎宗合同)의 경향이 있었다. 저명한 불자(佛者)로서는 덕청(德淸:山大師, 1546∼1623)·주굉(1535∼1615)·지욱(智旭)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주굉은 선(禪)을 깊이 연구하고 정토(淨土)를 염원하여 선과 정토에 관한 저술이 많으며 사상은 제종파합동의 경향을 갖는다. 유자(儒者) 출신인 지욱은 주굉의 을 읽고 주굉을 흠모해서 출가하여 천태·법상(法相)·염불에 정진하였다...
[백과사전] 팔사파 팔사파 八思巴(1235〔1239?〕∼1280) 파스파(Hphagspa)라고도 한다. 원조(元朝)의 초대 제사(帝師)가 된 티베트 사키야파의 법왕.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리하여 파스파(贅者)라고 불리었다. 즉위하기 전에 쿠빌라이에게 계(戒)를 수여했고, 그의 즉위와 함께 제사(帝師)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에 그는 티베트의 행정권, 몽고 전체의 불교행정권, 승려의 특권 등을 쿠빌라이로 하여금 승인토록 하였다. 1269년 티베트 문자에 기초를 둔 몽고 문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파스파 문자이다. 1274년 아우인 린첸에게 국사의 지위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백과사전] 만송행수 만송행수 萬松行秀 (1166∼1246) 금나라 시대의 불교승. 조동종(曹洞宗) 청원(靑原)하의 23세(世) 선승(禪僧). 하내(河內:河南省)에서 출생하여 자주대명사(磁州大明寺)의 설암만(雪巖滿) 아래에서 대오(大悟)하고 뒤에 만송헌(萬松軒)을 지어 여기에 자적(自適)하였다. 장종(章宗)의 귀의를 받고 여러 큰 절에 머물다가 뒤에 종용암(從容庵)에 은퇴하여 굉지(宏智)의 백송(百頌)을 평석(評釋)한 을 저술하였다. 엄격한 수선(修禪)에 정진함과 동시에 화엄교학에도 정통하였고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과 기타 제학(諸學)에도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하에는 종윤(從倫)·복우(福祐)·이순보(李純甫) 등이 있다.
[백과사전] 이세호 이세호 二稅戶 요대(遼大) 민호(民戶)의 일종. 글안(契丹)의 종실(宗室)·귀족·공신·사원에 주어진 민호로서 그들은 세의 반을 정부에, 반은 소속된 귀족과 사원에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민호를 이세호라고 불렀다. 요의 멸망과 더불어 종실과 귀족에 소속된 이세호는 양호(良戶)가 되었다. 사원에 소속된 이세호만은 금의 시대에도 존속되었고 사원의 승도들의 압박에 의하여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일부 사원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세호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과사전] 천인읍회 천인읍회 千人邑會 요·금시대(遼·金時代)에 나타난 승속(僧俗)의 신앙단체. 기원은 남북조 시대의 법사(法社)·의읍(義邑)에까지 소급되는 것으로서 당 말기경에 성행하였던 결사와 동일한 것인 듯하다. 신앙인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일정한 회비를 납부하고 이로써 회원에게 경제적 원조를 해준다는 성격이 강하였다. 가령 금나라때의 낙중부(樂中府) 삼학사(三學寺)의 천인읍회는 그 절에 있는 승려의 생활을 유지하고 보장해 주기 위하여 설치되어, 회원은 승려도 포함하여 매년 10월에 돈 200판(貫), 쌀 한 말을 바쳐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또 미타신앙(彌陀信仰)을 중심으로 하는 미타읍회(彌陀邑會)도 있었다.
[백과사전] 백운종 백운종 白雲宗 송(宋)·원(元)시대의 민간종교. 백운채(白雲菜)라고도 한다. 북송(北宋) 말경에 뤄양(洛陽) 보응사(寶應寺)의 중 청각(淸覺)이 항저우(杭州) 백운암(白雲庵)에 자리잡고 새로 연 종교로서 교도는 종조(宗祖)인 청각(淸覺)을 백운화상(白雲和上)이라 부르고 그의 가르침을 백운종이라고 하였다. 극단적으로 선종(禪宗)을 공격하였으므로 선종으로부터 격렬한 반격을 받고 사교로 판정되어 청각은 멀리 은주(恩州:廣東省)에 추방되었다. 그가 죽은 후 제자 혜능(慧能)이 유골을 여항남산(余杭南山:浙江省)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백운산 보령사(普寧寺)를 건립하였으며 이후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저쟝 지방이 백운종의 근거지가 되었다. 백운종은 천태종의 교계(敎系)를 이어받아 선종을 배척하고 대승십지(大乘十地)의 ..
[백과사전] 백련종 백련종 白蓮宗 남송(南宋)으로부터 원(元)·명(明) 시대에 걸쳐 성행된 대표적인 민간 신흥종교. 백련교라고도 한다. 남송의 고종(高宗) 때에 오군(吳郡:蘇州) 연상사(延祥寺)의 사문(沙門)인 자조자원(慈照子元:?∼1166)이 창시한 것으로 미타염불을 수행하고 계행(戒行)을 엄수하였던 것으로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백련사(白蓮社) 이름을 따서 백련채(白蓮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알기 쉬운 방법으로 포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남녀가 입교하였고 세금과 노역을 면하려고 하는 빈농출신의 사람들도 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이 종교의 결사(結社) 활동은 탄압을 받게 되고 자원(子元)은 유배당하였다. 남송 말기부터 원대에 걸쳐 쟝쑤·저쟝·푸졘 등의 지방에서 융성을 보았으나 여러 차례 사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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