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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봉은사의 역사 -1 판전(版殿) 글씨와 문예부흥기 봉은사 판전(版殿) 글씨와 문예부흥기 봉은사 문정왕후의 철권통치가 그녀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자 봉은사 위상이 급격히 쇠락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 도성에서 한강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대찰 봉은사는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에 많은 시인묵객들이 드나드는 명소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다. 특히 추사는 말년에 봉은사에 머물며 남호 영기 율사가 주도했던 80권 화엄경 경판 조성 불사에 동참했다. 추사의 글씨 가운데 최고이자 최후의 명작으로 꼽는 판전 현판 글씨를 남겼다. 이 글씨는 현재까지도 봉은사 판전에 부착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봉은사는 경기 남부의 서울을 비롯한 광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여주, 이천, 양평, 파주 등 8개 군 78..
[백과사전] 봉은사의 역사 조선불교의 중흥도량 봉은사(奉恩寺)는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원성왕 10)에 견성암(見性庵)이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회국사는 영축산에 은거했던 고승으로 원성왕에 의해서 국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견성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 들어 견성암은 수도산 아래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름도 봉은사로 고쳐 부르고 당시 불교중흥의 중심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성종의 아들이었던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지만 기행과 폭정을 일삼다가 이복동생이었던 진성대군의 반정으로 물러나고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이다.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특별히 봉은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중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종..
[백과사전] 삼계교 삼계교 三階敎 수(隋)나라의 신행(信行, 540∼594)이 당시 활발했던 말법사상(末法思想)에 입각하여 말법상응(末法相應)의 가르침으로서 설법한 것이며 보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한다. 신행은 불교를 3단계로 나누었으며 신행 당시는 이미 제3계의 말법에 들어가 어리석고 악한 범부(凡夫)는 제1계의 1승(一乘), 제2계의 3승 등의 별법(別法)에 의탁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부처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법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며 승에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일체불(一切佛)·일체법(一切法)·일체승(一切僧)에 귀의, 일체악(一切惡)을 끊고 일체선(一切善)을 닦아야 할 제3계의 보법(普法)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구원되지 않는다 하여 제3계의 불교, 즉 삼계교(三階敎)를 창도했다. 그는 구족계(具足戒)의 준수를 폐..
[백과사전] 밀교 밀교 密敎 수당시대(隋唐時代)의 종파 불교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밀교(密敎)의 전래이다. 다라니(陀羅尼)는 예로부터 조금씩 중국으로 전해졌으나 나란다사(寺)의 학승(學僧)이었던 선무외(善無畏)가 716년(玄宗의 開元4)에 입조(入朝)하여 밀교를 전하면서 과 그 밖의 것을 번역했다. 제자인 일행(一行, 683∼727)은 삼론(三論)과 천태(天台)를 배워 이 입장에서 을 주석하여 를 저술했다. 또한 720년(開元8)에는 역시 나란다사(寺)의 학승인 금강지(金剛智)가 와서 을 번역했으며 또한 그의 제자 불공(不空)은 스승의 사망 후 인도에 돌아가 밀교 경전(密敎經典)>을 비롯한 80부의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만다라(曼茶羅)의 염송(念誦), 다라니의 독송(讀誦),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인 수법(修..
[백과사전] 법상종 법상종 法相宗 법상종이란 제법(諸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종(宗)이란 뜻으로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세워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미륵(彌勒)·무착(無着)·세친의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에 기원하며 당나라 태종 시대에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간 현장(玄裝, 600∼664)이 호법(護法)의 제자 계현(戒贅)으로부터 호법 계통의 유식설을 전해받고 많은 경론(經論)을 전역(傳譯)함과 동시에 유식의 교리를 선양했다. 진체삼장(眞諦三藏)에 의해서 전해진 유식설을 '구역(舊譯)'이라고 함에 대해 이 현장이 전한 것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현장은 호법의 설을 중시하여 을 번역, 그의 제자 자은대사 규기(慈恩大師 窺基, 632∼682)가 · 등을 저술하여..
[백과사전] 율종 율종 律宗 율종은 계율을 종(宗)으로 하는 종파이며 북제(北齊)의 혜광(慧光)이 시작한 연구 학파가 발전하여 한 종이 된 것이다. 그후 율장 안에 분파가 생겨 법려(法礪, 569∼635)의 상부종(相部宗),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종(南山宗), 회소(懷素,625∼698)의 동탑종(東塔宗) 등 셋으로 나뉘었으나 그 가운데에서 도선의 남산율종이 다른 두 파를 압도, 번영을 누렸다. 도선은 단지 율종의 조직자일 뿐만 아니라 경록(經錄)으로서는 , 사서(史書)로는 , 도교(道敎)에 대해서는 · 등을 저술하여 다양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율(律)에 관해서는 이 소승률이며 대승불교도가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뜻을 두고, 유식의 교리를 원용(援用),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기본으로 하여 소승계를 중시하면서 ..
[백과사전] 선종 선종 禪宗 옛날 후한시대에 인도의 좌선(坐禪) 방법 등을 설법한 선경(禪經)이 전역(傳譯)되었으나 선종으로서 발전하는 선을 전한 것은 470년경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이며, 그후 북주파불(北周破佛)을 만난 혜가(慧可)·승찬(僧璨)을 거쳐 기주 황매(黃梅)에서 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선법을 설법한 도신(道信)·홍인(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에서 탁월한 많은 선자(禪者)가 배출되었으며, 이리하여 선종으로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 대표가 6조(六祖)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이다. 신수는 북지(北地) 양경(兩京)을 중심으로 북종선(北宗禪)을 보급, 혜능은 강남(江南)에 남종선(南宗禪)을 선양했는데 북종선이 빨리 쇠퇴했음에 비해 남종선은 신회(神會)·회양(懷讓)·행사(行思)를 비롯한 수..
[백과사전] 정토교 정토교 淨土敎 ··의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에 바탕을 두고 인도의 용수(龍樹)·세친(世親)에 사상적 기반을 갖는 정토교는 옛날 진나라 시대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에 의한 백련사(白蓮社)에 교단적 조직을 갖고 다수의 신봉자를 획득했으나 구칭염불에 의한 극락왕생을 설법하는 참된 중국 정토교로서의 조직화는 담란(曇鸞, 476∼542)에 의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는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을 주석하여 를 저술, 정토교 교리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 을 쓴 도작(道綽, 562∼645)으로서 불교를 성도(聖道)·정토의 둘로 나누어 말법5탁(末法五濁)의 세상에는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정토교가 유일한 길이라 했으며 또한 선도(善導, 613∼681?)에 이르러 정..
[백과사전] 화엄종 화엄종 華嚴宗 을 소의(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당대(唐代)의 화엄종 제3대 조사인 현수대사(贅首大師) 법장(法藏, 643∼712)[1]에 의해 번창된 종파이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불교 교리발전의 2대쌍벽(二大雙璧)으로 알려져 있다. 은 이미 인도에서 세친(世親)이 중 을 주석하여 을 지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중국 북위(北魏)에 지론종(地論宗)이 일어난 것처럼 연구가 왕성했다. 중국에 있어서도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駝跋陀羅)에 의해 이 번역되었다.
[백과사전] 천태종 천태종 天台宗 을 근본성전(根本聖典)으로 하고,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지의에 의해 개창(開創)된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일종(一宗)이다. 천태종의 계보(系譜)는 일찍이 인도의 용수(龍樹)에 의해 발단되었고, 북제(北齊)의 혜문(慧文)에서 혜사(慧思)를 거쳐 수(隋)의 지의에 이르러 을 최고위로 하는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에 의해 일종(一宗)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는 삼체원융(三諦圓融)의 심원한 교리체계를 세움과 동시에 사종삼매(四種三昧),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지관(止觀)의 실천에 의해 성불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이론과 실천을 교관2문(敎觀二門)으로 정리하여 천태교학(天台敎學)을 대성하였다. 그의 교학은 문인(門人)인 관정(灌頂)에 의해 필록(筆錄)되었는데, ·· 등 이른바 천태3대부(天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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