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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다솔사의 역사 다솔사(多率寺)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승려 연기(緣起)가 창립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의 이름은 영악사(靈岳寺)였다. 다솔사(陀率寺)로 이름이 바뀐 것은 선덕여왕 5년인 636년이다. 이때 자장율사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는 의상이 영봉사(靈鳳寺)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이 증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방장산의 형국이 대장군처럼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多率)는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이야기 전한다. 고려 말에 나옹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대양루는 조선 숙종 때 중건하면서 지어진 것이고, 나머지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승려로 이름이 있던 한용운과 최범술이 기거해 유명해..
[백과사전] 금선사의 역사 금선사(金仙寺)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사찰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된 시기여서 남대문 밖에서 물장수를 하며 기회를 엿보던 용파스님에게 어느날 임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사찰에 부과되는 부역을 면해달라는 청을 하자 정조 임금은 자신의 후사를 이을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용파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수행중인 농산스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신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
[백과사전] 금산사의 역사 금산사(金山寺) 금산사를 누가 창건했는지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아 금산사를 부흥시킨 진표율사를 실질적인 창건자로 여기기도 하지만 경덕왕 21년인 8세기 초 진표율사가 순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훨씬 이전부터 절이 창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의 기록에 의하면 '599년 백제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하고,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762년(경덕왕 21년)부터 766년(혜공왕 2년) 사이에 진표율사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킴으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935년에는 후삼국 가운데 ..
[백과사전] 금당사의 역사 금당사(金塘寺) 금당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의 열반종의 종조 보덕화상의 제자인 무상화상과 김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중기의 지리서에는 금당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이산에는 상원사, 혈암사, 쇄암사만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 중 어느 것이 금당사의 전신인지 또 언제 현재의 자리에 건립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금당사는 매우 퇴락하여 1978년에 지장전을 중건하였고 뒤이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대웅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이고 팔작 기와지붕이며, 지장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기와지붕이며, 삼성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이고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화, 목불좌상, 3층..
[백과사전] 기림사의 역사 기림사(祗林寺) 신라 때 인도 승려인 광유(光有)가 창건하고 이름은 임정사(林井寺)라고 했다. 643년에 원효가 중창한 뒤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기림사는 석가모니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기'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서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았다는 전설이 실려 있는데, 이때 신문왕이 귀환하는 도중에 기림사 서쪽에서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신문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의 터나 문무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전략적 요충지라 승병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 철종 14년인 18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 41..
[백과사전] 구룡사의 역사 구룡사(龜龍寺) 구룡사는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으므로,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에서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절이름 유래 668년(문무왕 8) 의상..
[백과사전] 관촉사의 역사 관촉사(灌燭寺) 고려 광종 19년(968) 혜명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비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하다.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개판하여 해인사로 옮겨간 목우자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판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안이라는 명승이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고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말한 이후,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내에는 불상, 석탑, 보물232호인 석등, 배례석, 석문 외에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14년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에 개수되었다.
[백과사전] 갑사의 역사 갑사(甲寺) 백제 이래 풍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서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 후의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신라의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써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왜군에 항거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갑사는 조선 선조 30년(1579)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선조 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
[백과사전] 사찰 이란? 사찰(寺刹, Temple) 사찰(寺刹, Temple) 혹은 절(寺)은 승려가 불상을 모셔놓고 불도를 닦고 교법을 펴며, 불교 신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 등지 국가들의 사찰을 불교사원(佛敎寺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암자(庵子)라고 한다.
[백과사전] 범어사의 역사 범어사(梵魚寺)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했다. 에는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금정산(金井山)이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건 당시 문무왕의 명으로 대규모의 불사를 해서 요사만도 360개의 방사이고, 토지가 360결,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년)에 묘전스님, 해민스님 등이 법당과 요사 등을 중수해서 현존하는 대웅전과 일주문은 그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리며, 특히 선불교의 전통이 강해서 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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