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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쌍계사의 역사 쌍계사(雙磎寺)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지어진 쌍계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대비(大悲)와 삼법(三法)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도를 닦은 곳이다. 처음에는 절 이름이 옥천사였으나, 신라 후기 정강왕 때 고쳐 지으면서 쌍계사로 바뀌었다.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벽암선사가 조선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쌍계사대웅전(보물 제500호),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전(보물 제925호)과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상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다. 지리산 쌍계사는 서부 경남일원의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 25개 본사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
[백과사전] 동화사의 역사 동화사(桐華寺)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에 동화사에 딸린 비로암의 3층 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경문왕 자신의 명의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을 즈음해서는 금당암의 3층 석탑도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화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사는 신라 말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한 현장으로,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거느리고 온 1만 명의 군사가 이곳 동수, 동화사에 주둔하며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순왕 1년(928년) 영조선사(靈照禪師)에 의해 부속 암자인 염불암이 지어지고, 같은 왕 7년(934년)에 동화사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동화사는 정종(靖宗) 2년(1036년), 왕명에 따라 개경(開京)의 영통사(靈通寺)..
[백과사전] 아미타불 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이라는 낱말은 무량광(無量光: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을 가진 것)의 뜻인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바(Amitabha)와 무량수(無量壽: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가진 것)의 뜻인 산스크리트어 아미타유스(Amitayus)의 두 원어의 음사(音寫)이다. 무량광(無量光)은 완전한 지혜(반야 · 보리)를 상징하고 무량수(無量壽)는 자비를 상징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가지 덕성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항상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구제불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에서 아미타불은 10겁 전에 성불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 수단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오랜 옛날에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라는 의미에서 구원..
[백과사전] 나무아미타불 이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명호의 하나로 육자명호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歸依)를 표명하는 정형구이다. "나무(南無)"는 나모(namo)의 음사어로 "예배, 절, 인사"를 의미하는 나마스(산스크리트어:namas )의 연성에 따른 변화형. "예배"에서 바꾸어 귀의(歸依, śaraṇāgamana)을 표명한다는 뜻으로 이용되며, "저는 귀의합니다"로 해석된다. "아미타(阿彌陀)"는 두 불명(佛名)인 "아미타바(무량의 광명, amitābha)"와 "아미타유스(무량의 수, amitāyus)"의 " 잴 수 없는(무량)"이라는 아미타(amita-)만을 음사한 것. 즉, "나무아미타불"이란 "저는 (헤아릴 수 없는 광명, 헤아릴 수 없는 수명) 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백과사전] 백양사의 역사 백양사(白羊寺)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렸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밤 스님의 꿈에 흰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호남 유일의 거찰이었으나 불타버렸고 고종 원년(1864년) 도암선사가 재건하고, 1917년..
[백과사전] 수덕사의 역사 -1 수덕사(修德寺) 창건역사 수덕사는 오래된 절의 역사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연혁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 어떤 기록에서는 559년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백제 말 숭제법사가 창건했다고 말하지만 근거는 없다. 백제 무왕 2년(601년) 혜현스님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이미 그 이전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언급된 백제사찰 가운데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 등 12개의 사찰 이름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수덕사 경내에서 백제시대의 와당과 와편 등이 발견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시대부터 유지되어온 사찰임이 분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백과사전] 수덕사의 역사 수덕사(修德寺) 창건설화 창건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수덕도령과 덕숭낭자 이야기다.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갔다가 먼발치에서 덕숭낭자를 보고 상사병에 빠진다. 여러번 청혼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한다. 끈질긴 청혼에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수덕도령은 욕심속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 직전에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절 짓기를 다시 했으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었다. 세번째는 탐욕을 내려놓고 부처님만 생각하며 절을 완공하였다. 그런데 약속대로 결혼은 하였으나 낭자는 도령의 손길을 거부하였다. 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버선 한쪽만 쥐어 있었다.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이 피어있었다. 낭자는 관세음보..
[백과사전] 통도사의 역사 통도사(通度寺) 신라 선덕여왕 재위 중인 646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고, 금강계단에 진짜 부처인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대웅전에는 부처의 모형인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선조 36년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 인조 19년 우운(友雲)이 중건하였다.
[백과사전] 송광사의 역사 송광사(松廣寺) 신라 말 혜린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길상사(吉祥寺)로 작은 규모의 절이었다. 이후 고려 인종 때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절을 확장하려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기면서부터이다. 이때 고려 희종이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그 동안 정유재란, 한국 전쟁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백과사전] 해인사의 역사 해인사(海印寺)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35년 11월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이곳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 889~967)이라는 당시 주지가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여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고 전답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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