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金山寺)
금산사를 누가 창건했는지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아 금산사를 부흥시킨 진표율사를 실질적인 창건자로 여기기도 하지만 경덕왕 21년인 8세기 초 진표율사가 순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 훨씬 이전부터 절이 창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의 기록에 의하면 '599년 백제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반포하고,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762년(경덕왕 21년)부터 766년(혜공왕 2년) 사이에 진표율사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킴으로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935년에는 후삼국 가운데 호남지역의 맹주였던 견훤이 아들인 신검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금산사에 유폐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문종 33년(1097년)에는 혜덕왕사가 중창해서 86개동 43개의 암자를 설치했다고 한다. 충숙왕 15년(1328년)에는 원명해원 스님이 또 한 차례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는 뇌묵당 처영스님이 금산사를 거점으로 의승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항했다.
정유재란으로 호남까지 왜군이 밀려들어오자 금산사는 왜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인조 13년(1635년) 수문대사에 의해 일부 복구되었고, 1725년에는 환성지안 스님이 화엄대법회를 개최해서 금산사에 1,400여 명의 대중이 몰려듦으로써 위협을 느낀 조정으로부터 제주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현재의 도량은 1961년 월주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일구기 시작해서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보제루 등을 신축하고 미륵전과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금강계단 등은 해체 복원해서 호남의 명찰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