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桐華寺)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에 동화사에 딸린 비로암의 3층 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경문왕 자신의 명의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을 즈음해서는 금당암의 3층 석탑도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화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사는 신라 말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한 현장으로,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거느리고 온 1만 명의 군사가 이곳 동수, 동화사에 주둔하며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순왕 1년(928년) 영조선사(靈照禪師)에 의해 부속 암자인 염불암이 지어지고, 같은 왕 7년(934년)에 동화사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동화사는 정종(靖宗) 2년(1036년), 왕명에 따라 개경(開京)의 영통사(靈通寺)와 숭법사, 대구의 부인사(符仁寺)와 함께 출가자의 불교 경율(經律)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다. 명종(明宗) 20년(1190)에는 조계종의 개조(開祖)가 되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신종(神宗) 5년(1202년)에 경주의 별초군이 난을 일으켰을 때 난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4년(1298년) 앞서 동화사를 하안소(下安所)로 삼았던 홍진국사(弘眞國師)의 유지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그가 입적한 뒤에 부도도 동화사에 세워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선조 39년(1606년),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유정(惟政)이 다시 중창하는데, 이때 동화사는 전국의 승병을 지휘하는 총본부로서의 역할도 갖게 되었다. 숙종(肅宗) 3년(1677년)에 상숭대사(尙崇大師), 영조 8년(1732년) 관허(冠虛)와 운구(雲丘), 낙빈(洛濱), 청월(晴月) 등에 의해 중창 중건되었는데, 현재 동화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의 당우들은 영조 때 중창된 것이다.
1911년 동화사에 아미산 포교당이 창건되었다. 일제 시대 31본산의 하나였던 동화사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중앙학림의 지시에 따라 대구로 온 윤학조가 3월 23일 동화사 지방학림(지금의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던 후배 권청학 · 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 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한 이들은 3월 30일, 대구 덕산정시장(남문 밖 시장)의 장날을 맞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투옥된다(3.30 대구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로 1917년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 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 낙성을 전후해 동화사의 많은 당우들이 새롭게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