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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 사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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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봉암사의 역사 봉암사(鳳巖寺) 헌강왕(憲康王) 5년(879년) 선승(禪僧) 도헌이 창건한 이래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선문(曦陽山門)의 종찰(宗刹)로써 선도량이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봉암사지증대사비》에는, 봉암사의 땅은 원래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가진 땅으로, 도헌 화상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자신이 가진 희양산 중턱에 선사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기이하고 장려한 산세를 본 도헌은 "이런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희양산 중턱의 봉암사 부지를 최치원은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묘사하였는데, 이러한 땅에 ..
[백과사전] 봉선사의 역사 봉선사(奉先寺)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승려 탄문이 운악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부른 것이 봉선사의 전신이라고 전해진다. 봉선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예종 때인 1469년이다. 왕의 어머니인 정희대비가 죽은 남편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이장하여 광릉이라하고, 이 절을 세조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아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종은 친필 현판을 하사하기도 했다. 1551년에는 교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되는 등 사세가 번창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1637년에 복구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또다시 전소되어 현대에 복원한 건물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태허(운암 김성숙)스님, 운허스님이 머물렀고, 운허의 친척 ..
[백과사전] 법화사의 역사 법화사(法華寺) 법화사는 수정사(水精寺)와 함께 제주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써,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길게는 통일신라 시대까지도 올라간다는 주장이 있다. 1990년 2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 법화사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건물터 다섯 곳과 초석 기단터 세 곳이 확인되었고, 발굴 유물은 당초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등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해무리굽 청자편이나 북송의 화폐인 숭녕중보(崇寧重寶)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기와들이 한반도 육지부에서도 황룡사터나 미륵사터와 같은 왕궁급 유적에서 주로 발굴된다는 점에서 법화사는 단순한 사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문명대 교수는 제주의 법화사가 신라 시대에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청해..
[백과사전] 법주사의 역사 법주사(法住寺)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
[백과사전] 백담사의 역사 백담사(百潭寺)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장경(藏經)을 전하고 율종(律宗)을 창건한 한계리 한계사의 고찰이다. 수차에 걸쳐 큰 화재를 입어 자리를 옮겨 다시 짓기를 반복하면서,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었다. 조선 1775년 현 위치에 법당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1783년에 백담사로 개칭하였다. 상대적으로 번잡했던 외설악에 비해 한적하고 원시림에 가까운 비경을 간직한 내설악의 입구에 위치해서 봉정암, 오세암 등 외딴 암자를 산내암자로 거느리고 있는, 내설악산을 대표하는 도량이다. 이에 시인 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이 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으며, 춘성은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했다..
[백과사전] 반야사의 역사 반야사(般若寺) 반야사는 원효대사 혹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스님이 720년(성덕왕 19년)에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전하는 기록은 없다. 무염국사가 황간 심묘사에 있을 때 사미승 순인을 보내 연못 속의 악룡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반야사라는 절 이름은 세조가 속리산 복천암으로 신미대사를 보러왔을 때, 세조의 거둥 날짜에 맞춰 반야사를 중창하고 그 회향법회에 세조가 참석하면서 세조가 내린 어필 현판 때문이다. 세조는 오대산 상원사에서처럼 문수동자의 영험으로 피부병을 고치게 되자 문수보살의 지혜를 일컫는 ‘반야’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고 한다. 그 현판이 아직까지 반야사에 보관중이라고 전해진다.
[백과사전] 미황사의 역사 미황사(美黃寺)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남송의 달관(達官), 군자(君子) 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전기까지도 사세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1754년(영조30년)에 기록된 에 보면 미황사는 임진왜란 이후 세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 해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1601년에 마무리되었고, 이때의 불사는 만선스님이 담당했다. 그뒤 1658년(효종 9년)에서 1660년(현종 1년)까지 두 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1751년(영조 27년)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
[백과사전] 미륵사의 역사 미륵사(彌勒寺) 미륵사 창건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성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를 하고 국호는 남부여로 개칭을 하였다. 양과 신라, 왜에 외교를 확대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은 후 고구려의 땅인 도살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으며 551년에 신라와 같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 6군의 권리를 되찾는다. 신라는 죽령이북 고현이남 한강 상류 유역 10군의 땅과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인하여 553년에 한강의 하류지역을 뺏기고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였다. 554년에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관산성에서 대패를 한 후 성왕은 전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제는 국가의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 후 120년 동안 나제 동맹이 깨지고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는 ..
[백과사전] 문수사의 역사 문수사(文殊寺) 문수사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3년 극락보전의 금동여래좌상에서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든 문서가 발견되어,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011년 현재 건물로는 극락보전, 삼층 석탑, 산신각이 있다. 극락보전은 복장 유물의 연대와 달리 1346년 이전에 불탔다가 조선 후기에 재건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에는 십육나한상, 지장보살도, 신중도, 삼세불회도 등이 소장되어 있다. 삼층 석탑은 3층의 옥개석과 상륜부의 보주가 그 크기에 있어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 다른 시기에 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문수사 극락보전에는 높이 69cm의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이 있다. 이 좌상은 1974년..
[백과사전] 묘각사의 역사 묘각사 이곳에 절을 지으면 서울시민이 편안하다는 풍수설에 따라 1942년 5월 태허 홍선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실제 관음사가 자리 잡은 낙산은 풍수설에서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그 끝자락에 묘각사가 놓여 있다.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서울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묘각사는 동대문 밖 서울시민의 안심입명 귀의처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템플스테이가 처음 시작된 2002년 월드컵 대회 때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되어 가장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1997년 2월 화재로 전소되었던 사찰을 7년 만에 크게 복원하여 현재의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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