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주요 사찰 정보/미륵사

[백과사전] 미륵사의 역사

728x90

미륵사(彌勒寺)

미륵사 창건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성왕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를 하고 국호는 남부여로 개칭을 하였다. 양과 신라, 왜에 외교를 확대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은 후 고구려의 땅인 도살성을 공격하여 차지하였으며 551년에 신라와 같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 6군의 권리를 되찾는다. 신라는 죽령이북 고현이남 한강 상류 유역 10군의 땅과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인하여 553년에 한강의 하류지역을 뺏기고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였다. 554년에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관산성에서 대패를 한 후 성왕은 전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백제는 국가의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 후 120년 동안 나제 동맹이 깨지고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무왕의 즉위 전에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다. 서동은 백제왕의 허락을 받은 후 진평왕과의 우호관계를 위해서 금을 지불하고 힘들게 결혼하였다. 이러한 결혼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 하에서 신라의 침입을 늦추고 신라와 함께 대처할 목적이었다. 선화공주는 무왕과 결혼을 하고 미륵사를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무왕은 미륵사를 지음으로써 국가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백제 말기, 대중들의 종교적인 기원과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면서 부처의 힘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고자 미륵사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특히, 미륵사와 같은 큰 사찰의 건설이 가능했었던 원인은 백제 공장들의 발달한 건축 기술과 토목 공사의 수행 능력 덕분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혜거국사 비문에 나타나있고,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최대'라고 강조하고 있다.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이 와유록에 있다. 그러나, 해체하여 구조를 살펴본 결과 1층부분에서 발생한 구조의 변화로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현재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서탑과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