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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요 사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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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용문사의 역사 용문사(龍門寺)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승려 대경(大境)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행차하여 직접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에 지천(智泉)이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이 곳에 옮겨 봉안했다. 조선 세종 29년인 1447년에 세종의 둘째 왕자인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보전을 다시 지었다.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 왕명으로 용문사를 중수하도록 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했으나, 대한제국 순종이 왕위에 오른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워버렸다. 1909년부터 차츰 중건하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현대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백과사전] 용궁사의 역사 용궁사(龍宮寺)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명칭인 용궁사로 바뀌게 되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용황각·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용궁사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씨(주련)가 4개 남아있다. 내부에는 본래 옥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는 맞배지붕집이며, 건물 앞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
[백과사전] 오천사의 역사 옥천사(玉泉寺) 옥천사(玉泉寺)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에 위치한 신라 천년의 고찰이다. 연화산 옥천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 지엄법사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을 강론하기 위해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창건한 절이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좌측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샘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비록 하동 쌍계사의 말사이지만, 당시에는 화엄종찰로 지정된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지어진 절은 여러 차례의 중창 과정을 거쳤다. 통일신라시대의 진경국사와 고려 시대의 진각국사 등이 이 절에 기거하며 수학하였고, 임진·정유왜란 때는 구국 승병의 군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호국사찰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운명을 맞기도 하였다. 옥..
[백과사전] 오세암의 역사 오세암(五歲庵) 오세암(五歲庵)은 설악산에 있는 암자이다. 백담사에 속한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고,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5살짜리 아이 길손이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누나 감이는 스님을 따라 절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손이는 마음을 볼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님을 따라 암자로 간다. 겨울 날 스님은 눈이 많이 오기 전 장을 보러 읍내로 내려가고, 그 사이 길손이는 들어가지 말라던 방에 들어가 탱화에 그려진 분을 '엄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봄이 되어 모두가 가 보니 길손이는 깨달음을 얻고 죽어 부처님이 되고 감이가 눈을 뜨게 된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교 명언.jpg dailyfeed.kr
[백과사전] 영지사의 역사 영지사(靈芝寺) 신라 태종무열왕 때인 7세기에 의상이 웅정암(熊井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조선 선조 때 중창하였다. 다시 절을 세운 사람이 영지대사라 이때 영지사로 개칭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영조 50년인 177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기록이 있다. 절 안에는 대웅전과 범종각, 명부전, 산신각, 요사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대웅전과 범종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자료 제207호로 함께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 안에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이황의 제자인 조호익의 시가 걸려 있고, 유물로 삼층석탑과 부도가 남아 있다. 영지사 입구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쥐라기 말기와 백악기 초기의 이구아노돈 계통 공룡의 발자국이다. 12개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육안으로는..
[백과사전] 향일암의 역사 향일암(向日庵) 향일암은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숙종 39년(1713)부터 숙종 41년(1715)까지 인목대사가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지어 ‘향일암’이라 하였다. 현재 전하는 건물은 모두 198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칠성각, 취성루,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관음전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비록 최근에 고쳐 지은 절이긴 하지만 섬 지역에까지 전파된 불교문화를 살필 ..
[백과사전] 연곡사의 역사 연곡사(鷰谷寺) 연곡사는 백제 성왕 22년(서기 544년) 인도의 고승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사찰로 당시 큰 연못이 있어 물이 소용돌이치며 제비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기 선종의 큰 사찰이었고, 도선국사, 현각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으나 소요태능 스님이 새로 지었다. 1907년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전소당하였고, 육이오 전쟁때 다시 전소되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교 명언.jpg dailyfeed.kr
[백과사전] 약천사의 역사 약천사(藥泉寺) 약천사의 창건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인근 한라산 중턱에 법화사라는 국제적인 큰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속암자가 인근에 산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약천사가 자리한 곳은 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가 솟는 곳으로 1982년 이곳에 약천사를 창건하기 훨씬 전부터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 당시 일제에 끌려갔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방동화 스님이 출소 후 몸조리를 위해 한 동안 머문 곳이 바로 중문의 약수암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960년대 유학자 김형곤 선생이 신병 치료차 자그마한 굴속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약수암을 짓고 수행..
[백과사전] 안심사의 역사 안심사(安心寺) 안심사 대웅전(安心寺大雄殿)은 안심사의 주존불을 모신 법당이며 목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의 일반형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80년 6월 1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66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혜공왕 11년(775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원명국사가 중건하고, 그 후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송암대사가 중건하였다. 현존 건물은 송암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청원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의 암막새 기와에는 강의 11년(1672년)의 명문(銘文)이 있어서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기와를 다시 올린 것을 알 수 있으며 1980년에도 기와를 거의 교체하여 보수하였다. 1989년에는 단청을 새로 하였다.
[백과사전] 심향사의 역사 심향사(尋香寺) 심향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미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언제부터 심향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왕사’로 기록하고 있고, 미륵전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정조 13년(1789) 무렵 까지는 ‘신황사’로 불렸던 듯하다.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현종이 이곳 나주로 몽진하여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신황사(神皇寺)’라는 이름에서 황제 황(皇)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이 절의 대법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미륵전, 극락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제작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다. 미륵전에는 석불좌상이 있으며,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특히 심향사아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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