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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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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구마라습 구마라습 鳩摩羅什(350∼409경) 당대(唐代)의 현장(玄奬)과 더불어 일컬어지는 대번역가. 쿠마라지바(Kumarajiva)의 음을 따서 구마라습이라 하고 이를 약하여 라습(羅什) 또는 습(什)이라고도 한다. 서역의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에 어머니를 따라 계빈·사륵(沙勒)에 유학하여 소승불교와 인도 학문을 배웠다. 사륵에서는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로부터 대승불교를 배우고 다시 용수계(龍樹系)의 공관불교(空觀佛敎)를 연구한 다음 귀국하였다. 20세 때에 십송률(十誦律)을 배워 비구가 되었다. 뒤에 후진(後秦) 요흥(姚興)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들어가 국사(國師)로서의 대우를 받고 소요원(逍遙園)과 대찰에서 경론의 번역에 종사하여 역경사에 있어서 하나의 시기를 이룩하였다. 그의 밑에 모인 학승..
[백과사전] 격의불교 격의불교 格義佛敎 위진시대(魏晋時代)의 중국불교계에 행해졌던 불교 연구의 일종.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일들을 유교의 고전과 노자·장자의 사상과 비교하여 유추(類推)함으로써 불교교리의 이해를 쉽게 하고 접근하기 쉽도록 하려는 방법. 가령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을 노장철학의 무(無)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 등을 말한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에 관한 학문이 성행하여 청담(淸淡)이 유행하였고 특히 노장사상과 유사한 표현 형식을 갖는 반야경과 유마경이 애독되고 이를 노장과 역(易)의 사상과 대비하여 연구 토론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리하여 불교의 공(空)의 의의에 관하여는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중국적 해석이 다투어 생겨났다. 이른바 이와 같은 철학적 격의를 특히 '현학(玄學)'이라..
[백과사전] 교학연구의 발달 교학연구의 발달 敎學硏究-發達 중국의 불교는 불도징과 도안의 출현으로 사상과 교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상과 불교교리를 그대로 중국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 편의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빌려 불교사상을 유추적(類推的)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축법아(竺法雅)나 강법랑(康法朗) 등은 이 격의불교의 대표자였다. 도안(道安)이나 혜원(慧遠)도 그것의 한계성을 느끼면서도 이 격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다. 라습(羅什)이 장안에 들어와 신역경론(新譯經論)을 내놓게 됨에 따라 종래의 잘못된 해석이 바로잡혀 라습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연구가 왕성해졌다. 그 중에서도 승조..
[백과사전] 도안 도안 道安(312∼385) 초기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高僧). 상산부유현(常山扶柳縣:河北省)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서역으로부터 온 불도징(佛圖澄)에 사사하였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였으나 마침 전란시대여서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허베이(河北)·산시(山西)·허난(河南)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랑하였다. 뒤에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더불어 양양(襄陽:湖北省)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엄숙한 구도와 연수를 위주로하는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79년에는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초빙을 받아 장안에 가서 국가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명실공히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게 되고..
[백과사전] 불도징 불도징 佛圖澄(233∼348) 불도등 혹은 부도징(浮圖澄)이라고 쓰기도 한다. 후조(後趙)시대에 활약한 서역승(西域僧).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젊어서 출가하였다. 오장국과 계빈국에서 수학하고 경전을 독송하기를 수백만어에 달하여 경전의 본의(本義)에 정통하였다 한다. 310년(西晋의 永嘉 4)에 뤄양(洛陽)으로 왔다. 영가(永嘉)의 난이 있은 뒤 백성의 괴로움을 구하기 위하여 잔인스러운 맹장이었던 석륵(石勒)을 교화하고 홍법(弘法)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왕의 고문이 되어 군사와 정치에도 참여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북방민족을 불교문화와 신통력으로 이끌어나갔다. 후조의 왕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신임을 받아서 교단과 국가와의 관계가 밀접해졌으며 후조국(後趙國) 안에 있어서의 포..
[백과사전] 축법호 축법호 竺法護 서진(西晋)시대에 활약한 역경승. 법호는 다르마라크샤(Dharmaraksa)의 음역. 월지국(月氏國) 출신으로 지법호(支法護)라고도 불리었으나 스승인 축고좌(竺高座)의 축(竺)을 따서 보통 축법호라고 부른다. 그는 둔황(敦煌)에서 활약하였기 때문에 둔황보살(敦煌菩薩)이라고도 한다. 툰황으로부터 장안·뤄양(洛陽)에 걸쳐 유랑하면서 경전의 번역과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손으로 번역된 경전은 반야경·법화경·유마경(維摩經)·무량수경(無量壽經) 등 초기의 대승경전에 속하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모두 154부에 달했다고 한다. 라습(羅什) 이전에는 질과 양에 있어서 최대의 역경승이었다.
[백과사전] 주자행 주자행 朱子行 한족 출신으로서 최초로 출가한 승려. 영천(潁川:허난성의 許州東北)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경전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의 강(講)을 받을 때에 너무 간략하여 의미가 애매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새로운 범본(梵本)을 찾아 260년(曹魏의 甘露5)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코탄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새로 얻은 범본을 불여단(弗如檀:法饒)에 위탁하여 뤄양(洛陽)으로 운반하였다. 뒤에 이것이 번역되어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 되었다. 주자행은 중국에 돌아오지 않고 코탄에서 죽었다.
[백과사전] 지루가참 지루가참 支婁迦懺 후한시대에 중국에 온 역경승의 하나. 로칵세마(Lokaksema)의 음역. 147년 후한의 뤄양(洛陽)으로 와서 183년(中平3)에 이르기까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수릉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아축불국경 등 14부(일설에 의하면 23부)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가 사용하였던 원전은 거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이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지량(支亮)이 있으며 지루가참·지량·지겸(支謙:삼국시대의 역경자)의 셋을 삼지(三支)라고 한다.
[백과사전] 안세고 안세고 安世高 후한(後漢)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譯經僧)의 한 사람. 파르티아(安息國:현재 서북인도·페르시아 지방)의 왕자였으나 왕위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자(字)는 세고(世高), 안(安)은 그의 출신국인 안식(安息)을 나타낸 것.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고 148년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부 40권의 경전을 번역 소개하였다. 그의 경전번역은 중국 역경사의 최초기의 일이다. 후한시대의 역경은 대체적으로 생경(生硬)하고 난해하다.
[백과사전] 경전한역 경전한역 經典漢譯 인도에서 성립한 경전은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에 수입되었다. 그리하여 인도나 서역의 언어문자로 쓰여진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에 의해서였다. 이 두 사람이 중국에 온 것은 2세기 후반으로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시대였다. 최초의 시기에 있어서 역경자들이 번역하는 데 얼마나 힘을 들였는가는 현존하는 그들의 번역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인이나 서역인들과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중국인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외래의 역경자들 덕택이었다. 이 두 사람 외에 축불삭(竺佛朔)·안현(安玄)·지요(支曜)와 강거(康巨)·강맹상(康猛詳)·축대력(竺大力)·담과(曇果)·지량(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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