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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약천사의 역사 약천사(藥泉寺) 약천사의 창건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인근 한라산 중턱에 법화사라는 국제적인 큰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속암자가 인근에 산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약천사가 자리한 곳은 사철 마르지 않는 약수가 솟는 곳으로 1982년 이곳에 약천사를 창건하기 훨씬 전부터 약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무오법정사항일운동 당시 일제에 끌려갔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방동화 스님이 출소 후 몸조리를 위해 한 동안 머문 곳이 바로 중문의 약수암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960년대 유학자 김형곤 선생이 신병 치료차 자그마한 굴속에서 100일 기도를 올리던 중 꿈에 약수를 받아 마신 후 건강을 회복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약수암을 짓고 수행..
[백과사전] 안심사의 역사 안심사(安心寺) 안심사 대웅전(安心寺大雄殿)은 안심사의 주존불을 모신 법당이며 목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의 일반형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80년 6월 1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66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혜공왕 11년(775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에 원명국사가 중건하고, 그 후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송암대사가 중건하였다. 현존 건물은 송암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청원군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의 암막새 기와에는 강의 11년(1672년)의 명문(銘文)이 있어서 조선 현종 13년(1672년)에 기와를 다시 올린 것을 알 수 있으며 1980년에도 기와를 거의 교체하여 보수하였다. 1989년에는 단청을 새로 하였다.
[백과사전] 심향사의 역사 심향사(尋香寺) 심향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미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언제부터 심향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왕사’로 기록하고 있고, 미륵전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정조 13년(1789) 무렵 까지는 ‘신황사’로 불렸던 듯하다.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현종이 이곳 나주로 몽진하여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신황사(神皇寺)’라는 이름에서 황제 황(皇)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금이 이 절의 대법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미륵전, 극락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제작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다. 미륵전에는 석불좌상이 있으며,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특히 심향사아미타..
[백과사전] 신흥사의 역사 신흥사(新興寺) 신흥사는 652년(진덕여왕 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향성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향성사란 명칭은 “중향성불토국”이란 뜻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동방 약 1km 지점에 세웠으나 701년(효소왕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의상조사가 지금의 신흥사 북방 1.5km 지점인 현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를 중건하여 불법을 전하다가 인조 20년(1642)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고승 영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현 위치에 중건하고 신흥사라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신흥사는 1912년부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건봉사가 38선 이북지역으로써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역이라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국군이 수복한 이후 1971년 신흥사가 대한불교조계종 ..
[백과사전] 신륵사의 역사 신륵사(神勒寺)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彌勒)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는 고려 우왕 때 왕사 나옹(王寺懶翁)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세 번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
[백과사전] 신광사의 역사 신광사(新光寺) 신라 흥덕왕 5년(831년)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헌종 15년(1849년)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 신광사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 너와지붕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된 명부전이 있다. 이 외에도 대웅전 남쪽에는 정면, 측면 모두 1칸으로 된 칠성각과 대웅전 정면에는 2동의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다.
[백과사전] 수종사의 역사 수종사(水鍾寺)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 二水頭: 兩水里 )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 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 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 온다.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으로 자연경관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봄·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
[백과사전] 성불사의 역사 성불사(成佛寺) 태조산에 있는 절로, 고려 태조(재위 918~943) 때 도선국사가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고려 목종 5년(1002)에 담혜가, 1398년에는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고쳐 세웠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경내의 건물로는 중심 건물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지 않고, 유리창을 통하여 뒷편 암벽에 조각이 완성되지 않은 서있는 모습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설화에 의하면 고려 도선이 이곳에 왔을 때 백학(白鶴) 한쌍이 대웅전 뒤쪽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날아간 자리에 성불사를 지었다고 한다.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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