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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관촉사의 역사 관촉사(灌燭寺) 고려 광종 19년(968) 혜명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비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하다. 1499년(연산군 5) 가야산 봉서사(鳳栖寺)에서 개판하여 해인사로 옮겨간 목우자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판본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안이라는 명승이 석조 미륵보살 입상을 보고 "마치 촛불을 보는 것같이 미륵이 빛난다."라고 말한 이후, 관촉사(灌燭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내에는 불상, 석탑, 보물232호인 석등, 배례석, 석문 외에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14년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에 개수되었다.
[백과사전] 갑사의 역사 갑사(甲寺) 백제 이래 풍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서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 후의 통일신라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신라의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써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왜군에 항거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갑사는 조선 선조 30년(1579) 정유재란 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선조 37년(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
[백과사전] 사찰 이란? 사찰(寺刹, Temple) 사찰(寺刹, Temple) 혹은 절(寺)은 승려가 불상을 모셔놓고 불도를 닦고 교법을 펴며, 불교 신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장소이다.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 등지 국가들의 사찰을 불교사원(佛敎寺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암자(庵子)라고 한다.
[백과사전] 범어사의 역사 범어사(梵魚寺) 부산 금정산에 위치한 범어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했다. 에는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이 금정산(金井山)이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건 당시 문무왕의 명으로 대규모의 불사를 해서 요사만도 360개의 방사이고, 토지가 360결,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에 달하는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년)에 묘전스님, 해민스님 등이 법당과 요사 등을 중수해서 현존하는 대웅전과 일주문은 그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리며, 특히 선불교의 전통이 강해서 선찰..
[백과사전] 쌍계사의 역사 쌍계사(雙磎寺)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지어진 쌍계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대비(大悲)와 삼법(三法)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도를 닦은 곳이다. 처음에는 절 이름이 옥천사였으나, 신라 후기 정강왕 때 고쳐 지으면서 쌍계사로 바뀌었다. 지금의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벽암선사가 조선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쌍계사대웅전(보물 제500호),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전(보물 제925호)과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상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다. 지리산 쌍계사는 서부 경남일원의 사찰을 총람하는 조계종 25개 본사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
[백과사전] 동화사의 역사 동화사(桐華寺) 경문왕(景文王) 3년(863년)에 동화사에 딸린 비로암의 3층 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이 경문왕 자신의 명의로 조성되었다. 9세기 후반을 즈음해서는 금당암의 3층 석탑도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화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사는 신라 말기 고려와 후백제가 충돌한 현장으로,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거느리고 온 1만 명의 군사가 이곳 동수, 동화사에 주둔하며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순왕 1년(928년) 영조선사(靈照禪師)에 의해 부속 암자인 염불암이 지어지고, 같은 왕 7년(934년)에 동화사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동화사는 정종(靖宗) 2년(1036년), 왕명에 따라 개경(開京)의 영통사(靈通寺)..
[백과사전] 아미타불 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이라는 낱말은 무량광(無量光: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을 가진 것)의 뜻인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바(Amitabha)와 무량수(無量壽: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가진 것)의 뜻인 산스크리트어 아미타유스(Amitayus)의 두 원어의 음사(音寫)이다. 무량광(無量光)은 완전한 지혜(반야 · 보리)를 상징하고 무량수(無量壽)는 자비를 상징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가지 덕성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항상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구제불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에서 아미타불은 10겁 전에 성불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 수단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오랜 옛날에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라는 의미에서 구원..
[백과사전] 나무아미타불 이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명호의 하나로 육자명호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歸依)를 표명하는 정형구이다. "나무(南無)"는 나모(namo)의 음사어로 "예배, 절, 인사"를 의미하는 나마스(산스크리트어:namas )의 연성에 따른 변화형. "예배"에서 바꾸어 귀의(歸依, śaraṇāgamana)을 표명한다는 뜻으로 이용되며, "저는 귀의합니다"로 해석된다. "아미타(阿彌陀)"는 두 불명(佛名)인 "아미타바(무량의 광명, amitābha)"와 "아미타유스(무량의 수, amitāyus)"의 " 잴 수 없는(무량)"이라는 아미타(amita-)만을 음사한 것. 즉, "나무아미타불"이란 "저는 (헤아릴 수 없는 광명, 헤아릴 수 없는 수명) 아미타불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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