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236)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과사전] 묘각사의 역사 묘각사 이곳에 절을 지으면 서울시민이 편안하다는 풍수설에 따라 1942년 5월 태허 홍선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실제 관음사가 자리 잡은 낙산은 풍수설에서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그 끝자락에 묘각사가 놓여 있다.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서울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묘각사는 동대문 밖 서울시민의 안심입명 귀의처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템플스테이가 처음 시작된 2002년 월드컵 대회 때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되어 가장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1997년 2월 화재로 전소되었던 사찰을 7년 만에 크게 복원하여 현재의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백과사전] 명봉사의 역사 명봉사(鳴鳳寺)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승려 두운(杜雲)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산 속에서 봉황이 울어서 명봉사로 명명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17세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창한 기록이 있다. 울창한 숲과 깊은 산 속에 자리잡아 고요한 느낌을 준다. 명봉사는 예전에는 큰 건물에 승려도 다수 기거하는 대형 사찰이었다고 하나, 한국 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지금은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소백산 용문사와는 산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백과사전] 망월사의 역사 망월사(望月寺) 신라 시대인 선덕여왕 8년(639년)에 해호(海浩)가 신라 왕실을 위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망월사라는 이름은 절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봉우리인 월봉이 있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는데서 유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왕이 있는 경주 월성을 바라본다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가 나라가 망한 뒤 이 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신라 왕실과 관련이 깊고, 의정부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한용운의 상좌였던 춘성이 주지를 지내는 등 주로 선승들이 많이 찾는 선불교의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전쟁 피해로 여러 차례 소실되어 건물은 현대에 다시 지은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망월사 혜거국사 부도 등 다수.. [백과사전] 만일사의 역사 만일사(萬日寺) 673년(신라 문무왕 13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무학 대사가 이성계의 조선 건립을 기원하기 위해 중건했다고 한다. 또한 무학이 이 절에서 만일동안 기도했기 때문에 절 이름이 ‘만일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온다. 이성계와 순창 고추장에 얽힌 설화가 있으나, 이는 고추가 조선에 전래된 시기를 봤을 때 잘못된 것이다. 한국 전쟁 중에는 옆의 회문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민유격대에 의해 승려가 살해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1951년 8월 13일에는 법당이 빨치산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육군이 절 건물을 소각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천년 고찰로 전해지고 있는 만일사의 '비(碑)'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51호로 지정 고시 됐다. 만일사 '비'에는 17세기 .. [백과사전] 마곡사의 역사 마곡사(麻谷寺) 640년(백제 무왕 41년, 신라 선덕여왕 9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월정사와 통도사를 창건할 때 선덕여왕에게 토지 200결을 받아 전탑을 세우고 이곳 마곡사도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고 범일이 재건하였다.그뒤 보철화상이 주석할 때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이 삼대처럼 빽빽하게 많아서 마곡사라는 절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절이 폐사되고 이곳도 200년 가량 도둑의 소굴이 되었는데, 고려 명종 2년(1172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도둑떼를 몰아낸 후 제자 수우스님과 함께 대규모 불사를 벌여 중창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조가 이 절에 거둥해서 영산전 현판을 친필로 남기기도 하고 자신이 타고 온 가마.. [백과사전] 동학사의 역사 동학사(東鶴寺)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유신 길재가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재냈고, 삼은각에서는 고려만 유신인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 세조 3년에 김시습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세조가 이듬해인 1458년에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사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 조선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고 고쳐 불렀다. 1728년 화재로 절과 초혼각이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건하였고, 한국 전쟁 때 다시 절이.. [백과사전] 동해사의 역사 동해사(東海寺)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에 조선 태조의 스승 격이었던 무학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름과는 달리 내륙에 있으며 바다와 접하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무학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상주를 떠나가는 배의 형상으로 보고, 높은 곳에 절을 지은 뒤 이 절이 돛대 역할을 하여 동해로 나가 발전하라는 의미에서 동해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상주에서는 고려 말에 나옹이 세웠다는 갑장산 갑장사와 함께 오래된 절이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특별한 문화재도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몇 차례 중건한 기록이 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한국 전쟁 후인 현대에 다시 지었다. 직지사에 보관 중인 조선 후기 양식의 석불 1기가 동해사 재건 중 나온 것이다. [백과사전] 도갑사의 역사 도갑사(道岬寺) 도갑사는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인 도선국사가 신라 헌강왕 6년에 창건했다. 고려시대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초 세조 때 고승인 수미대사가 1456년(세조 2년)에 대가람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세종에 의해 국사로 모셔진 수미대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도갑사를 966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했다. 조선 효종 4년(1653년)에는 도선수미비 그리고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 등이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던 이경석, 이수인, 정두경 등이 비문을 썼다고 한다. 그 후로도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했으며, 18세기 중엽에는 당대 화엄학의 대종주였던 연담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를 편찬.. 이전 1 ··· 103 104 105 106 107 108 109 ··· 15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