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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선운사의 역사 선운사(禪雲寺)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조 18년(1794) 임우상이 기술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법명을 법운자로 한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진흥굴 윗산에 중애암을, 만월대 아래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고 공민왕 3년(1354)에 재중수하였으며 조선 성종 5년(1474)에 행조선사가 중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무장태수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통해 161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재건하였다. 선운사는 한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을 내세운..
[백과사전] 선암사의 역사 선암사(仙巖寺) 백제 성왕 7년인 529년에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해천사(海川寺)라고 부른 것이 선암사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남북국 시대에 와서 도선이 선암사를 창건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고려 시대에 의천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천태종의 본거지로 번창했으나,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절이 거의 소실되었다. 복구도 늦어져 1660년에야 중창되었다. 태고보우 조사의 가풍을 이어받아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선조사의 법맥상속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과사전] 십일면관음보살상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백과사전] 본존불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
[백과사전] 석굴암의 역사 석굴암(石窟庵)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석불사'라는 현판도 발견되었다. 석굴암에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빼고 다 대칭이다. 뒤에 위치한 광배이다. 이 광배가 비대칭인 이유는 아래에서 바라볼 때 원이 대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광배는 160cm 높이에서 바라보면 정확한 원으로 보이는데, 이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의 키는 일반적으로 160cm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화강암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
[백과사전] 서광사의 역사 서광사(瑞光寺)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857~?]이 886년(정강왕 1)에서 893년(진성여왕 7)까지 부성군[현 서산] 태수로 부임했을 때 부춘산의 상부, 중부, 하부의 세 곳에 암자를 지었다고 하나 모두 확인할 수 없다. 상부암과 중부암은 일찍 폐사되고 하부암만 남았지만 이름은 1980년대 초까지 삼선암이라 불렸다. 1986년 법장이 주지로 부임한 뒤 전통 사찰로 지정되고 명칭도 서광사로 바뀌었다. 서광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와 어우러지는 정경은 서산팔경의 제5경인 선암모종(仙庵暮鐘)[삼선암의 저녁에 지는 종소리]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에 대웅전이 완공되었으며 2009년 11월 27일 여래보궁 봉안식을 열고 진신사리를 봉..
[백과사전] 쌍봉사의 역사 쌍봉사(雙峰寺) 신무왕 원년(839)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감선사 도윤의 주석(駐錫)으로 사세(寺勢)가 커졌다. 나말여초기(羅末麗初期)에는 견훤 세력을 후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최씨무신정권 3대 집권자인 최항이 쌍봉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점을 볼 때 사세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사세가 꺾여 갔다. 1911년에는 사찰령의 시행으로 해남 대흥사의 말사(末寺)로 편입되었다. 해방 후 대한불교 조계종의 성립으로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편입돼 현재에 이른다. 건물은 여러 번의 중창을 거듭하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백과사전] 상원사의 역사 상원사(上院寺) 창건연대는 뚜렷하지 않으나 세조(世祖)가 이 절에 거동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성찰(盛刹)로서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398년에 조안화상(祖眼和商)이 중창(重創) 하였으며 세조 8년(1463)에는 왕이 직접 거동하였고 곧이어 중창불사를 행했으며 효령대군의 원찰이 되었다. 순종 원년(1907)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는데 1918년에 주지 최화송 화상과 화주 차상원이 큰방을 복원하였다. 이어 1934년에 주지 최경언이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 1969년 주지(住持) 덕송(德松)이 초막(草幕) 삼 칸을 짓고 복원에 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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