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한국의 주요 사찰 정보

(99)
[백과사전] 향림사의 역사 향림사(香林寺)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국사가 세웠고 조선 현종 10년(16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은 신라말의 승려이자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때 이수광이 편찬한 『승평지』에 따르면 이 부근의 지형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그 기운이 너무 강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향림사를 지었다고 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향림사(香林寺)라는 이름에 맞추기라도 하듯 절 주변에는 ..
[백과사전] 표충사의 역사 표충사(表忠寺)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竹林寺)이다.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5년(1839)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
[백과사전] 칠장사의 역사 칠장사(七長寺) 칠장사는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넓혀 세웠는데 ‘칠장사’와 ‘칠현산’이라는 이름도 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선하게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인조 원년(1623)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절로 삼아서 크게 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세도가들이 이곳을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불태운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숙종 20년(1694) 세도가들이 또 다시 절을 불태웠다. 숙종30년(1704)에 대법당과 대청루를 고쳐 짓고 영조 원년(1725)에 선지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
[백과사전] 청암사의 역사 청암사(靑巖寺)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었다. 1897년에 폐사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11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이 복구했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도..
[백과사전] 천장사의 역사 천장사(天藏寺) 천장사는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나 담화선사는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며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나 유적도 현존하지 않는다. 천장사 칠층석탑으로 유추할 때, 고려 시대 창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부에 관음사의 후불탱화로 1788년(정조 12) 제작된 불화가 있는데 관음사가 어느 절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1896년(고종 33) 제작된 신중탱화도 있다. 근현대 경허(鏡虛)[1849~1912]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1871~1946]이 머물렀고 만공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 한다. 한편 최인호(崔仁浩)의 소설 『길없는 길』로 널리 알려졌다. 법당 앞에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2호로 지정된 천장사 칠층석탑이 있..
[백과사전] 천곡사의 역사 천곡사(泉谷寺) 천곡사는 신라 시대에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피부병을 앓던 선덕여왕이 천곡사가 있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의 약수에 목욕하고 완쾌한 뒤,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해 하면서 자장에게 명하여 지어진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도 천곡령에서 따왔고, 절 안에는 선덕여왕이 목욕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 석정(石井)이 남아 있다. 가뭄이 심할 때도 석정에서는 맑고 영험한 물이 샘솟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후 오랫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전쟁 피해를 자주 겪어 여러 차례 폐사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13동의 건물을 보유한 대형 사찰이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친 뒤 부도탑과 석주, 건물 몇 채만 남은 작은 ..
[백과사전] 직지사의 역사 직지사(直指寺) 신라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 산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해서 ‘직지’라는 사명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절을 중건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조선 15대 광해군 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재건하였다.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黃岳山)은 청, 황, 적, 백, 흑의 5색 중에서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우리나라를 놓고 볼 때 직지사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황악산이라 부르고 그 안에 터를 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동국제일가람으로 불려 왔다. 황악산..
[백과사전] 증심사의 역사 증심사(證心寺) 신라 헌안왕 4년(860년)에 철감선사 도윤이 처음 세운 절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선종 11년(1094년)에 혜조국사가 중수했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 김오(金傲)가 자신의 녹봉으로 낡은 건물을 다시 고쳐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다시 지었고, 그 뒤에도 개·보수를 거듭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전화로 불에 타 없어졌다. 금동석가여래입상(당시 국보 제211호)과 금동보살입상(당시 국보 제212호)은 광주경찰서 금고로 옮겨 보관되고 있었으나 전쟁 중에 유실되어, 국보 지정도 해제됐다. 오늘날의 건물은 1970년에 크게 증축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백과사전] 전등사의 역사 전등사(傳燈寺)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한국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길다.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명명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신부주(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고려 왕실은 전등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계속해서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조선 광해군 대에 이르러 화재로 ..
[백과사전] 자재암의 역사 자재암(自在庵)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증건했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