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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대백과사전/불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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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염불선 염불선 念佛禪 교선일치(敎禪一致) 사상은 당의 중기 이후 특히 송대(960∼1280)에 들어와 점차 두드러지게 되었다. 오대(五代, 907∼960)와 송초(宋初)에는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교선일치설이 한층 이름이 높았고 천태·화엄·정토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고 선가(禪家)에서 교학(敎學)을 공부하는 자도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염불선이 가장 성하였으며 정토종(淨土宗)은 후세에 들어와 특별한 하나의 종파라기보다는 각 종파의 사람이 염불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성행하였다. 송대의 정토교도로서 유명한 사람이 선·천태 출신 중에 많고 특히 천태계통의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주창하고 100권, 을 지은 영명연수(永明延壽)를 비롯하여 종이·종본(宗本)·법수(法秀)·의회(..
[백과사전] 천태선 천태선 天台禪 소위 선종(禪宗)이 발생하기 수세기 전에 천태(天台) 지자대사(智者大師, 538∼597)는 모든 불교를 선(禪)이라는 한 글자로 통일하고 모든 수행(修行)을 좌선(坐禪)으로 요약하였다. 이 일문(一門)을 선종이라 부르고 그 영향은 후세의 선 집단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천태대사(天台大師)의 (통칭 小止觀이라 함)은 좌선에 관한 책으로는 사상 처음 완성된 것으로서 이 책을 모범으로 하여 뒤에 중국·일본의 좌선의(坐禪儀)에 관한 여러 종류가 생겨났다. 천태대사는 좌선을 만행(萬行)의 귀취(歸趣), 지관을 좌선의 내용이라 하여 이를 설파한 것이 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으로서 선(禪)이라는 한 자에 불교를 내포시키고 있다. 이들 저서에 실린 사상은 좌선이 불교의 수도에 있어서 가장..
[백과사전] 교선일치 교선일치 敎禪一致 교종(敎宗), 즉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종파와 선종(禪宗), 즉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불타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종파가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 전자는 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 등이고 후자는 소위 선종(禪宗)을 말한다. 교선일치의 주장은 당(唐)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후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교학(華嚴敎學)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일치시키고자 교선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일치의 사상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차차 뚜렷해져서 선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대(五代)와 송초(宋初)의 영명연수(永明延壽)의 교선..
[백과사전] 법림 법림 法琳(572∼640) 수당(隋唐)시대의 불교승. 영천군(潁川郡:河南省)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출가하였다. 박학하여 특히 삼론(三論)에 정통하였는데 도술을 배워 도사로 전향하였다. 다시 불교에 귀의한 뒤로는 장안의 안제법사(安濟法寺)에 자리잡고 강설을 폈다. 621년(武德 4)에 부혁(傅奕)이 사원승니사태(寺院僧尼沙汰) 11조를 상주(上奏)하였을 때 즉시 상소를 올려 잘못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중향(李仲鄕)이 , 유진희(劉進喜)가 을 지어 불교를 비난하였을 때에 그는 8권을 지어 맹렬한 반론을 전개하였다. 태종은 칙명으로 종남산(終南山)의 대화궁(大和宮)을 용전사(龍田寺)로 바꾸고 그를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파라파라가밀다라(波羅頗迦羅密多羅)의 역장(譯場)에서 필수철문(筆受綴文)에 종사하여 보성다라니..
[백과사전] 3교담론 3교담론 三敎談論 당나라 중기부터 성행하게 된 궁중에 있어서의 유교·불교·도교의 대표자들에 의한 토론회.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자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의 초기 고조(高祖)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武德 7)에 박사(博士) 서광(徐曠)에게 을, 사문(沙門) 혜승(慧乘)에게는 을, 도사 유진희(劉進喜)에게는 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太宗)은 639년(貞觀 13)에 제주(祭酒) 공영달(孔潁達), 사문(沙門) 혜정(慧淨), 도사(道士) 채황(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弘文殿)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후 대종(代宗)·덕종(德宗)·경종(敬宗)·문종(文宗)·무종(武宗)·선종(宣宗)..
[백과사전] 불공 불공 不空(705∼774) 당나라 시대의 불교승. 밀교경전의 역경자. 원명은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이고 번역해서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 하며 보통 불공이라 약칭한다. 밀교창법의 제6대조. 실론(일설에는 북인도)에서 태어나 720년(開元 8)에 스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따라 남해를 경유하여 뤄양(洛陽)에 왔다. 이후 약 30년간 금강지에게서 밀교를 배우고 산스크리트와 중국어의 재능을 살려 스승의 역경사업을 도왔다. 금강지가 죽은 뒤 그의 유지를 받들어 함광(含光) 등과 함께 실론·인도에 건너갔다. 우선 실론의 보현아사리에게서 비법을 배우고 뒤이어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범본(梵本)과 밀교경전을 얻어가지고 746년(天寶 5)에 장안에 돌아왔다. 그후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
[백과사전] 금강지 금강지 金剛智(671∼741) 당나라 시대의 불교승. 밀교경전의 역경자. 원명은 바즈라 보디(跋日羅菩提:Vajra의 제5대조. 중부 인도의 마라야국(摩羅耶國)에서 태어나 10세 때에 나란다사(寺)에 출가하였다. 성명(聲明)·인명(因明)을 배우고 다시 대소승(大小乘)의 율(律)·중관(中觀)·유가유식(瑜伽唯識) 등을 공부하였다. 31세때 남인도에 가서 용지(龍智)에게서 밀교를 배워 금강정경(金剛頂經) 등의 밀교경전에 정통하게 되었다. 38세때 중부인도에 돌아와 불적(佛蹟)을 참배하고 다시 남인도 및 실론을 순례하였다. 716년경에 중국에의 포교를 뜻하여 남해를 건너 719년(開元 7) 광주에 도착, 이듬해 뤄양과 장안에 들어갔다. 현종(玄宗)의 칙령에 따라 대자은사(大慈恩寺)에 거주하였고 뒤에는 대천복사(大..
[백과사전] 선무외 선무외 善無畏(637∼735) 당대(唐代)의 불교승. 인도로부터 중국에 밀교를 전한 역경승(譯經僧). 원명은 슈바카라 심하(Subhakarasimha:淨獅子)라고 한다. 동인도의 오다국(烏茶國:오릿사)에서 출생, 13세에 출가하였다. 중부 인도의 나란다사(寺)에서 달마국다(達磨鞠多)에 사사하고 밀교를 배워 그 깊은 뜻을 깨우쳤다. 중국에 가서 밀교를 전파하라는 스승의 명령으로 캐시미르를 거쳐 716년(開元 4) 장안에 들어왔다. 현종황제(玄宗皇帝)의 귀의를 받고 흥복사(興福寺)·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밀교를 선포(宣布)하고 을 번역하였다. 724년(開元 12)에는 뤄양(洛陽)의 복선사(福先寺)에 있으면서 이듬해에는 밀교의 근본 성전 가운데 하나인 7권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이미 당의 학승(學僧) 무행..
[백과사전] 밀교의 발달 밀교의 발달 密敎-發達 밀교라 함은 현교(顯敎)에 대한 말로 불교의 비밀심오(秘密深奧)한 교리를 뜻한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인도의 밀교는 대일여래(大日如來)로부터 금강살타·용수(龍樹)·용지(龍智)를 거쳐 금강지(金剛智)·선무외(善無畏)에 전해졌다고 한다. 중국에 전래된 것은 오래 전에 동진시대(東晋時代:317∼419)의 전반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大灌頂神呪經), 시기병경(時氣病經), 청우주경(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 경전이 번역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諸天)의 위덕(威德)을 찬미하는 따위의 주문이 주를 이루며 이른바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주술적(呪術的)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백과사전] 백장 백장 百丈(749∼814) 당나라 때 선승.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지만 정식으로는 백장산회해(百丈山懷海)이다. 휘(諱)는 회해(懷海). 푸조우(福州) 장락현(長樂縣:福建省)에서 출생. 서산혜조(西山慧照)를 따라 삭발하고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 밑에서 구족계(具足戒)를 깨우쳤다. 여강(廬江)의 부차사에 들어가 그곳의 경장(經藏) 안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연구하였다. 그후 767년경에는 남강(南康:江西省)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만나 사사하였다. 마조 밑에서 수도를 하여 대오(大悟)하였다. 후에 백장산(江西省)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 제자들을 지도 교화하였다. 그 중에는 황벽희운(黃檗希運)과 위산영우도 있었다.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고 하는 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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