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1042)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과사전] 5·4운동 5·4운동 五四運動 '5·4'란 1919년 5월 4일을 뜻하는 것으로 이날에 베이징(北京)의 학생 약 3000명이 일본과의 21개조 조약과 파리평화조약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고, 이를 계기로 해서 전국에 파급된 애국정치운동이다. 이 데모는 베이징 군벌정부(軍閥政府)의 탄압을 받았으나 이것은 오히려 전국적인 공명을 불러일으켜 6월 3일 이후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상인·노동자를 포함하는 대규모 동맹파업으로 발전하여 결국 베이징 정부를 굴복시킴으로써 친일요인(親日要人)의 파면과 파리조약의 조인 거부를 승인하게 하였다. 인텔리겐차에 의하여 15년 이후 전개된 문화계몽운동(신문화운동)이 이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와 과학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유·불·도의 3교, 민간종교, 미신 등에 대한 .. [백과사전] 변혁기의 불교 변혁기의 불교 變革期-佛敎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인하여 청조(淸朝)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었다. 청말(淸末) 이래의 묘산흥학(廟産興學) 사업은 중화민국에 계승되어 사원이나 승려는 새로운 사회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극단론조차도 나타나게 되었다. 모든 옛것을 일소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5·4 운동(五四運動)에 이르러 이러한 움직임은 절정에 달하였고 유·불·도 3교나 민간의 미신적 종교에 대한 비판이 심해졌다. 이에 대하여 불교측에서는 민국 초기 이래 대동단결하여 불교의 위기를 타개해보려는 움직임이 여럿 있었는데 1929년에는 태허(太虛) 등에 의하여 중국불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태허는 뒤에 난징(南京)에서 중국불학회를 만들고 잡지 을 주재하여 밖으로는 불교도의 이익을 옹호함과 동시에 안으.. [백과사전] 민간불교 민간불교 民間佛敎 중국에 있어서의 민간불교, 즉 일반 서민이 신앙하였던 불교는 명청시대(明淸時代)에도 전대(前代)에 비하여 변화가 없었다. 교단불교의 일반적인 형태는 선정융합(禪淨融合)으로서 좌선과 염불이 아울러 행해지고 있었으나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불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혼효(混淆)된 잡다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관음신앙(觀音信仰)이나 지장신앙(地藏信仰)은 아미타(阿彌陀)나 미륵신앙(彌勒信仰) 못지 않게 성해서 도교도(道敎徒)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반대로 도교적인 황제상(皇帝像)이나 신상(神像)이 사원 내에서 받들어지게 되었고 도교적인 행사가 거행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서민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불보살(佛菩薩)이건 도교의 신들이건간에 크게 다.. [백과사전] 왕양명 왕양명 王陽明(1472∼1528) 명대의 유교학자. 이름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를 양명이라고 한다. 이른바 양명학(陽明學)을 펴낸 사람. 저쟝성 출생. 과거를 보기 위하여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다정다감하고 호쾌한 기질로 인하여 관학적(官學的)이고 형식적인 주자학에 만족할 수 없어서 임협(任俠)·기사(騎射)·문학·도교·불교 등에 차례차례로 탐닉하였다(이를 五溺이라 한다). 28세때 진사에 급제하여 관리생활에 들어갔으나 35세때 환관(宦官)의 횡포를 비난하였으므로 귀주성(貴州省)의 용장역(龍場驛)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지행합일(知行合一) 학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시기였다. 39세에 귀향을 허락받고 돌아와서 심즉리(心卽理) 학설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격물(格物)이.. [백과사전] 3교일치 3교일치 三敎一致 유교·불교·도교의 3교는 각기 성립 경위와 사상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3교를 조화시켜 절충융합하려는 움직임이 삼국시대 이후 끊임없이 나타났다. 손작(孫綽)의 , 주옹의 , 고환(顧歡)의 등이 3교조화의 입장에 있으며 맹경익(孟景翼)의 과 안지추(顔之推)의 은 2교일치(二敎一致)를 주장하고 있다. 수대(隋代)의 이사겸(李士謙)이나 왕통(王通), 당대(唐代)의 양숙(梁肅)·이고·징관(澄觀)·종밀(宗密)·여동빈(呂洞賓) 등은 입장이나 뉘앙스에 차이는 있으나 모두 3교합일론을 펴고 있다. 송대(宋代)에서는 계숭(契崇)·장상영(張商英)·효종황제(孝宗皇帝)·이순보(李純甫) 등이 있으며 원대(元代)에는 유밀(劉謐)이 있다. 명대(明代)의 대표적인 불교인으로서는 운서주.. [백과사전] 운서주굉 운서주굉 (1535∼1615) 인화(仁和:浙江省)에서 출생하였으며 연지대사(蓮池大師)라고 존칭된다. 화엄종의 학승(學僧) 변융(辯融)과 선승 소암(笑巖)에게서 불학(佛學)을 배웠으나 후에 여러 곳을 편력한 후 마침내 항저우(杭州:浙江省)의 운서(雲棲) 산골짜기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 운서사(雲棲寺)를 다시 일으키고 문하의 제자 교육, 신도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 밑에 1000여인(人)의 승속(僧俗)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광인(廣印)·원현(元贅) 등이 유명하다. 그의 사상적인 특색은 여러 종파를 융합하여 통일적인 불교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점에 있다. 그는 계율(戒律)의 부흥에 노력하고 계율을 기초로 하여 이에 선(禪)과 염불을 융합시켰다. 일체의 행위를 선악2문(善惡二門)으로 나누고, 선.. [백과사전] 삼종일원 삼종일원 三宗一源 명(明)의 태조(1368∼1398)가 선승(禪僧) 출신이라고도 하며, 재상이었던 송염(宋濂)도 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두 사람은 다 같이 불교와 불교도를 보호하고 대장경의 간행을 행하였다. 종세(宗勢)로서는 선종이 우뚝하여 다른 종파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천태·화엄·정토의 제종파는 교종합동(敎宗合同)의 경향이 있었다. 저명한 불자(佛者)로서는 덕청(德淸:山大師, 1546∼1623)·주굉(1535∼1615)·지욱(智旭)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주굉은 선(禪)을 깊이 연구하고 정토(淨土)를 염원하여 선과 정토에 관한 저술이 많으며 사상은 제종파합동의 경향을 갖는다. 유자(儒者) 출신인 지욱은 주굉의 을 읽고 주굉을 흠모해서 출가하여 천태·법상(法相)·염불에 정진하였다... [백과사전] 팔사파 팔사파 八思巴(1235〔1239?〕∼1280) 파스파(Hphagspa)라고도 한다. 원조(元朝)의 초대 제사(帝師)가 된 티베트 사키야파의 법왕. 어렸을 때부터 매우 영리하여 파스파(贅者)라고 불리었다. 즉위하기 전에 쿠빌라이에게 계(戒)를 수여했고, 그의 즉위와 함께 제사(帝師)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에 그는 티베트의 행정권, 몽고 전체의 불교행정권, 승려의 특권 등을 쿠빌라이로 하여금 승인토록 하였다. 1269년 티베트 문자에 기초를 둔 몽고 문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파스파 문자이다. 1274년 아우인 린첸에게 국사의 지위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백과사전] 만송행수 만송행수 萬松行秀 (1166∼1246) 금나라 시대의 불교승. 조동종(曹洞宗) 청원(靑原)하의 23세(世) 선승(禪僧). 하내(河內:河南省)에서 출생하여 자주대명사(磁州大明寺)의 설암만(雪巖滿) 아래에서 대오(大悟)하고 뒤에 만송헌(萬松軒)을 지어 여기에 자적(自適)하였다. 장종(章宗)의 귀의를 받고 여러 큰 절에 머물다가 뒤에 종용암(從容庵)에 은퇴하여 굉지(宏智)의 백송(百頌)을 평석(評釋)한 을 저술하였다. 엄격한 수선(修禪)에 정진함과 동시에 화엄교학에도 정통하였고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과 기타 제학(諸學)에도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문하에는 종윤(從倫)·복우(福祐)·이순보(李純甫) 등이 있다. [백과사전] 이세호 이세호 二稅戶 요대(遼大) 민호(民戶)의 일종. 글안(契丹)의 종실(宗室)·귀족·공신·사원에 주어진 민호로서 그들은 세의 반을 정부에, 반은 소속된 귀족과 사원에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민호를 이세호라고 불렀다. 요의 멸망과 더불어 종실과 귀족에 소속된 이세호는 양호(良戶)가 되었다. 사원에 소속된 이세호만은 금의 시대에도 존속되었고 사원의 승도들의 압박에 의하여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일부 사원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세호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1 ··· 82 83 84 85 86 87 88 ··· 10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