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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대백과사전/불교의 역사

[백과사전] 송학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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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과 선

宋學-禪
송대에 와서 훈고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宋學)이라 한다. 이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방법으로서 참선을 하는 일도 있어서 주렴계(周濂溪)는 귀종사(歸宗寺)의 불인(佛印), 동림사(東林寺)의 상총(常總)으로부터 불교 학문을 배웠고, 장횡거(張橫渠)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명도(程明道)는 노석(老釋)을 공부하기를 수십년 동안 하였다 하고, 정이천(程伊川)도 선을 배웠다 한다.
특히 주자(朱子)는 어릴 때부터 대혜종고(1163년 寂)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의 선승(禪僧) 위산영우의 사상을 사랑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선이 당시 명유(名儒)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던가? 선은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직절(直截)한 수도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하고자 하였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서 초범탈속(超凡脫俗)한 대덕(大德)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하였다. 또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對談)에 가득 찬 선가(禪家)의 어록(語錄)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 지심견성(指心見性) ―― 선(禪)이 교상(敎相)에 치우치지 않고 문자에 빠지지 않으면서 단도직입으로 자기의 심성(心性)을 구하여 대성하려고 한 수도의 방법. 이것은 도가(道家)의 주정복귀(主靜復歸)와 부합될 뿐만 아니라 유학(儒學)의 진심지성(盡心知性)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선의 실참실수(實參實修)에 의하여 비로소 도가에서 추구하는 이상향(理想鄕)에 이를 수 있으며 또한 유교의 뜻을 문자로 표현함에 있어 더욱 깊은 뜻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공자·노자의 가르침은 선의 중개 역할에 의하여 내용상으로 융합할 수 있었다.
(2) 승원(僧院)의 청규(淸規) ―― 승원의 규칙은 <백장청규(百丈淸規)>로부터 비롯된 청규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과 유교의 예악(禮樂)과의 조화를 실제주의를 통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해탈에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계율의 형식에 따라서 형성된 예악은 형식에 빠지기 쉬운 유교에 비하여 진지하며 아울러 자연스럽게 행해졌다.
<함순청규서(咸淳淸規序)>에 "우리에게 청규 있음은 유가에 예경(禮經)이 있음과 같으니라"라 하고 <지대청규서(至大淸規序)>에 "총림예법(叢林禮法)의 대경(大經)이로다"라 하여 모두 청규로서 유(儒)의 예로 삼고 있다.
(3) 간명(簡明)과 탈속(脫俗) ――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은 이성과 정뿐만 아니라 곧바로 모든 인격에 호소할 것을 요구하고 번잡한 필설(筆舌)에 빠지게 되는 것을 피하였다. 탈속(脫俗)하여 초연한 입장에 서고 그 언동이 스스로 규구(規矩)에 합치되므로 사가(師家)의 명목을 발휘하는 선장(禪匠)의 생활은 형식적으로 되기 쉬운 유가(儒家)의 무리에 대하여 신풍(新風)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장(禪匠)의 간명과 탈속은 도가(道家)의 허무염담과 매우 유사하여 많은 제가(諸家)가 공명하는 바였다.
주씨(周氏)·소자(蘇子)의 법우(法友)였던 불인료원(佛印了元)과 구양수(歐陽脩)의 법우였던 조인거눌(祖印居訥), 장상영(張商英)의 법우였던 덕홍각범(德洪覺範) 등은 유불 2도(儒佛二道)에 달통하고 문재(文才)에 뛰어나 당시의 학자들을 움직였다. 종문(宗門) 제일의 서(書)라고 일컬어지는 <벽암집(碧巖集)>과 당의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에 나타난 <능엄경(楞嚴經)>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고 거사(居士)로서 주석자(註釋者)가 된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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