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 대백과사전/불교의 역사

[백과사전] 대승불교의 흥기

728x90

대승불교의 흥기

大乘佛敎-興起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BC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는 쇠퇴·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보았고 그러한 세력은 실론을 위시한 남방 제국(諸國)으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4∼5세기간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소승불교와 함께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형성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Arhan)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불타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本生譚)·아바다나(Avadana:譬喩文學)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경전(經典)들이 만들어졌다. 대승경전의 성립이 그것이다.
1세기 후반에 쿠샨(Kusan:貴霜) 왕조가 성립되고 그 3대 왕인 카니시카(Kania)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한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그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現) 페샤와르(Peshawar)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로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 왕조의 영토가 인도와 중국을 잇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 지방에서 마투라(Mathura)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는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하여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 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有部)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캐시미르 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 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BC 1세기에서 기원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경전 가은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공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Nagarjuna)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Madhyamaka → karika)>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layavijana)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Maitreya)·무착(無着:Asanga)·세친(世親:Vasubandhu)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은 세친 이후 유력한 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佛護:Buddhapalita, 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Baviveka, 490∼570경)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Candrakrti, 600∼650경)과 적천(寂天:antideva, 650∼760경)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antaraksita, 680∼740경)·연화계(蓮華戒:Kamalasila, 700∼750경)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陳那:Dinnaga, 400∼480경) 계통과 덕혜(德慧:Gunamati, 420∼500경)와 안혜(安慧:Sthiramati, 470∼550경)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Dharmapala, 530∼561)·법칭(法稱:Dharmakrti, 643∼673)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소위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