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151)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과사전] 월정사의 역사 월정사(月精寺)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는 오대산의 중심 사찰이다. 자장율사는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산서성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문수보살은 자장율사에게 부처님 정골사리와 가사, 발우를 전해주며 신라로 돌아가 경주 동북방의 오대산에서 다시 볼 것을 말했다. 신라로 돌아온 자장율사는 지금의 오대산으로 들어와 임시로 초암을 지어 머무르면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3일 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 전하는 신효거사가 이곳에 머물며 수행했고,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신의스님이 자장율사가 초암을 지었던 터에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입적 후 이 암자는 오랫동안 황폐해졌는데 수다사의 유연스님.. [백과사전] 운주사의 역사 운주사(雲住寺) 운주사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해서 이곳 지형이 배형으로 되어 있어 배의 돛대와 사공을 상징하는 불상 천 위와 탑 천 개를 세웠다 하여 일명 천불천탑이라 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 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雲住寺在千佛千塔之左右山背石佛塔名一千又有石室二石佛像異座”란 기록이 있어 현존 석불석탑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사찰경내의 많은 석불 및 석탑은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정교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되며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기간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4년 이후 4차례 발굴과 석조불감해체복원, 원형다층석.. [백과사전] 운수암의 역사 운수암(雲水庵) 백운산 무양성에 있는 운수암은 운적암이라고도 하며, 영조 26년(1750)에 지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과부가 된 장씨부인이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성 밖에 절터를 닦았는데, 꿈에 노승이 나타나 절을 성 안쪽에 지으라고 하여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그 뒤 고종 7년(1870) 흥선대원군이 시주하여 다시 지었으며, ‘운수암’이라 직접 쓴 현판도 하사하였다. 1986년에 대웅전을 고쳐 짓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비로전, 요사채 등이 있다. 비로전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몄으며, 안쪽에는 고려시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백과사전] 운문사의 역사 운문사(雲門寺)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하였다.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중건하였다. 고려 태조 20년(937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여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태조 26년(943년)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여 운문사(雲門寺)라 불리게 되었다. 숙종 10년(1105년)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설송(雪松)이 중건하였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교 명언.jpg dailyfeed.kr [백과사전] 용주사의 역사 용주사(龍珠寺)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창건주는 염거화상으로 도의국사에 이어 가지산문 제2대 조사이다. 고려 광종 때는 혜거국사가 머물며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갈양사가 다시 중창하게 된 것은 조선 제22대 정조 임금 때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인다. 아버지 묘와 화성의 건설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둥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의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때 정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스님이 보일당 사.. [백과사전] 용문사의 역사 용문사(龍門寺)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승려 대경(大境)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행차하여 직접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에 지천(智泉)이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이 곳에 옮겨 봉안했다. 조선 세종 29년인 1447년에 세종의 둘째 왕자인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보전을 다시 지었다.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 왕명으로 용문사를 중수하도록 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했으나, 대한제국 순종이 왕위에 오른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워버렸다. 1909년부터 차츰 중건하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현대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백과사전] 용궁사의 역사 용궁사(龍宮寺)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명칭인 용궁사로 바뀌게 되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용황각·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용궁사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씨(주련)가 4개 남아있다. 내부에는 본래 옥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는 맞배지붕집이며, 건물 앞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 [백과사전] 오천사의 역사 옥천사(玉泉寺) 옥천사(玉泉寺)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에 위치한 신라 천년의 고찰이다. 연화산 옥천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 지엄법사에게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을 강론하기 위해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창건한 절이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좌측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샘이 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비록 하동 쌍계사의 말사이지만, 당시에는 화엄종찰로 지정된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지어진 절은 여러 차례의 중창 과정을 거쳤다. 통일신라시대의 진경국사와 고려 시대의 진각국사 등이 이 절에 기거하며 수학하였고, 임진·정유왜란 때는 구국 승병의 군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호국사찰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운명을 맞기도 하였다. 옥.. [백과사전] 오세암의 역사 오세암(五歲庵) 오세암(五歲庵)은 설악산에 있는 암자이다. 백담사에 속한다.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고,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5살짜리 아이 길손이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누나 감이는 스님을 따라 절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손이는 마음을 볼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님을 따라 암자로 간다. 겨울 날 스님은 눈이 많이 오기 전 장을 보러 읍내로 내려가고, 그 사이 길손이는 들어가지 말라던 방에 들어가 탱화에 그려진 분을 '엄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봄이 되어 모두가 가 보니 길손이는 깨달음을 얻고 죽어 부처님이 되고 감이가 눈을 뜨게 된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보는 불교 명언.jpg dailyfeed.kr [백과사전] 영지사의 역사 영지사(靈芝寺) 신라 태종무열왕 때인 7세기에 의상이 웅정암(熊井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조선 선조 때 중창하였다. 다시 절을 세운 사람이 영지대사라 이때 영지사로 개칭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영조 50년인 177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기록이 있다. 절 안에는 대웅전과 범종각, 명부전, 산신각, 요사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대웅전과 범종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자료 제207호로 함께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 안에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이황의 제자인 조호익의 시가 걸려 있고, 유물로 삼층석탑과 부도가 남아 있다. 영지사 입구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쥐라기 말기와 백악기 초기의 이구아노돈 계통 공룡의 발자국이다. 12개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육안으로는..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