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2) 썸네일형 리스트형 [백과사전] 왕양명 왕양명 王陽明(1472∼1528) 명대의 유교학자. 이름은 수인(守仁), 자는 백안(伯安), 호를 양명이라고 한다. 이른바 양명학(陽明學)을 펴낸 사람. 저쟝성 출생. 과거를 보기 위하여 주자학(朱子學)을 배웠으나 다정다감하고 호쾌한 기질로 인하여 관학적(官學的)이고 형식적인 주자학에 만족할 수 없어서 임협(任俠)·기사(騎射)·문학·도교·불교 등에 차례차례로 탐닉하였다(이를 五溺이라 한다). 28세때 진사에 급제하여 관리생활에 들어갔으나 35세때 환관(宦官)의 횡포를 비난하였으므로 귀주성(貴州省)의 용장역(龍場驛)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지행합일(知行合一) 학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시기였다. 39세에 귀향을 허락받고 돌아와서 심즉리(心卽理) 학설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격물(格物)이.. [백과사전] 거사불교 거사불교 居士佛敎 오대(五代)와 송(宋)으로부터 근대에 걸쳐 거사를 중심으로 행하여진 불교를 말한다. 거사라 함은 원래 관계에 나가려는 뜻을 버리고 불교의 문에 들어온 사대부(士大夫)를 말한 것인데 이 시기에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불교의 경전과 교리에 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교단의 보호와 육성에 힘쓰는 독지가를 가리켰다. 오대로부터 송으로 넘어와서는 염불결사(念佛結社)가 이곳 저곳에 생기고 지식인들간에 열렬한 신자들이 생겨났다. 또 선종이 성행되면서 송학(宋學)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유가(儒家)가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어 양억(楊億)·소식(蘇軾)·양걸(楊傑)·왕안석(王安石) 등은 불교의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였다. 명대말(明代末)로부터 청대초(淸代初)에는 유불도(儒佛道..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