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序說〕 불교란 글자의 뜻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法)이라고도 하므로 불교를 불법(佛法), 또는 부처(佛)가 되는 길을 가리키므로 불도(佛道)라고 부를 때도 있다. 불교의 근본은 교조(敎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 akyamuni)가 35세에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달마(達磨:dharma, 眞理라는 뜻)를 깨침으로써 불타(佛陀:Buddha, 끼친 사람·覺者)가 된 후 80세에 입적(入寂)할 때까지 거의 반 세기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말씀한 교설이다. 또한 부처님의 연대를 기원전 5세기로 잡으면, 그후 2500년간 불교는 근본불교(根本佛敎)·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 소승(小乘)과 대승(大乘)불교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고 경전(經典)도 여러 가지가 새로 편찬되어 왔다. 따라서 교리나 의식도 여러 지방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으므로 한마디로 불교는 이것이라고 묶어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특이한 면이다. 불교의 교조 석가모니는 브라만(Brahman)의 정통교리와 사상이 흔들리던 기원전 5세기에 브라만 계급이 아닌 제2계급, 즉 크샤트리아(Ksatriya)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브라만 정통사상에 회의를 느끼며 부정적으로 대하던 많은 비(非)브라만계의 신흥사상가들이 출연활동하였다. 브라만 정통교리를 신봉하는 승려(僧侶)들에 대하여 이들 신흥사상가들은 사문(沙門: ramana)이라고 불리었다. 불교도 이같은 비브라만계 신흥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정통 브라만 사상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고 본질론적(本質論的)인 경향도, 또는 여기에 대하여 회의적·부정적인 경향을 나타낸 신흥사상도 지양한 입장을 지녔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보류하였다는 기록이 초기 경전에 보인다. 즉, 이 세상에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는 내세(來世)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변을 보류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어떤 전제(前提)나 선입관(先入觀)을 근거로 하는 추론(推論)을 피하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입장을 지향하였다. '아트만( tman)'이나 '브라만(Brahman)'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실존(實存)이 문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깨친 달마, 즉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依存) 관계에 있으며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닥치고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즉 불교이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인생문제의 해결이란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 같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이론은 배제된다. 또 부처님은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 그때그때 가르침의 색채를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일방적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도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불교 교리를 발전 단계에 따라 설명하려면 먼저 원시불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 고행(苦行)도 그가 맛보았던 태자(太子) 시절의 쾌락처럼 진리를 깨닫는 길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불타는 두 극단을 지양하는 길에서 이치를 깨달았다. 두 극단을 지양한 길을 원시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불렀다. 이 중도의 구체적·실천적 조목을 8정도(八正道), 곧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즉, 바른 견해(見解), 바른 의지(意志), 바른 말, 바른 명상(暝想) 등 여덟 가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실천 덕목인데 이론적·교리적 근거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4성체(四聖諦)가 있다. 인간의 존재를 설명한 네 가지 진리는 첫째 고(苦)를, 둘째 고의 근원을, 셋째 고를 이기는 것을, 넷째 고를 이김으로써 이르는 길 등이다. 인간의 존재를 고(苦)로 파악한 초기 경전은 탄생도 고이고, 늙어감도 고이고, 병도 고이고, 죽음 역시 고이며, 미운 사람을 만남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고이고,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 하여 고의 종류를 나누었다. 한마디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나 정신적 요소, 즉 5온(五蘊)이 모두 고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8정도·4성체는 부처님이 깨친 후 제일 처음 말씀한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그후 설명 형식과 방법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불교 교리의 기본 골자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불교의 실천 요목을 계(戒)·정(定)·혜(彗)의 체계(體系)로 설명하는 수가 많다. 인간이 불교가 가리키는 이상, 즉 열반(涅槃)을 실현하기 위하여 날마다 실천해야 할 생활 규범이므로 출가(出家) 수행자(修行者)와 재가(在家) 수행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적 5계, 즉 살행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그렇다고 계율만 엄격히 지키는 일은 윤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율에 근거하여 보다 높은 거룩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는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선정(禪定), 즉 명상·정신적 통일·지관(止觀)이라고 한다. 선정이라고 해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 소극적·부정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감각(感覺)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무아(無我)의 적극적 자세로 전환하여 자유의 경지를 개발하는 것이 선정의 본분이다. 그러나 선정이 주관적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르고 엄격한 계율적 실천이 앞서야 한다. 따라서 바른 선정은 계율에 의하고, 또 계율은 바른 선정에 의하여 거룩한 종교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계율과 선정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해탈(解脫)에 이르는 지혜의 터득을 위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에 의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淸淨)한 사람이 선정(禪定)에 의하여 이르는 최고의 경지가 이 지혜이다. 이같은 지혜를 불교는 반야지(般若智)라고 하므로 다른 지혜와 구별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고 불교에서는 각(覺)과 오(悟)와 동의어(同義語)로 쓰이는 일이 많다. 그후 불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통을 고수하려는 보수파, 즉 상좌부(上座部)와 정통을 비판하는 진보파, 즉 대중부(大衆部)로 크게 갈라진다. 상좌부는 윤회(輪廻)의 고(苦)로부터 해탈하는 길은 감각적 욕망의 근원을 끊기 위해 출가한 수행자의 생활을 본받아 엄격한 계율에 의한 수행에 의해 마음과 몸이 안정을 얻고 최고 성자인 아라한(阿羅漢:arhan)의 경지에 이르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처님도 아라한에 이른 성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파는 우리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님같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중생(衆生)과 부처(佛)가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란 이론이 전개될 근거를 주었다.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출현한 대승경전들은 위대한 사상가 용수(龍樹:Nagarjuna)의 출현으로 이론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그는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緣起)를 보다 심오한 체계로 전개하였다. 용수에 의하면 경험에 나타난 모든 대립을 부정하고 절대적 1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립의 도식(圖式)을 생과 멸, 오는 것과 가는 것, 중단(中斷)과 계속, 같은 것과 다른 것 등으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윤회와 열반은 본질적 1원적 입장에서 동일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본질적 동일성을 아는 지혜가 반야라는 것이다. 이 용수의 학설과 항상 대립되는 입장을 지니고 발전하여 온 것이 무착(無着:Asa ga)·세친(世親:Vasubandhu) 형제의 유식(唯識) 사상이다. 이 두 형제는 용수의 절대적 1원론의 입장을 시인하면서도 인간존재의 구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상당히 복잡한 관념론을 세웠다. 그들은 이 세계는 사유적(思惟的) 구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사유를 떠나서 외계(外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관적 사유의 투영(投影)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의식(意識)의 흐름, 즉 알라야(alaya)뿐이란 것이다. 알라야는 새로운 흔적(痕跡)을 쌓음으로써 일정한 경향을 형성하고 이 형성에 의하여 사람의 성격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徐 景 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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